“너의 운명으로 달아나라”를 읽고

오늘 소개 하고 싶은 책은 로쟈라는 닉네임으로 유명하신 이현우 님의 <너의 운명으로 달아나라>입니다.
어제 밤 자기 전에 다 읽었는데, 다 읽고 내가 한 말이 “이 책 읽기 잘 했어.”였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니체의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핵심개념인 “초인”과 “영원회귀” 개념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 후에는 니체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작가들과 그 작품들을 초인과 영원회귀 개념으로 해석하고요.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예전에 읽긴 읽었습니다. 그냥 눈으로만 읽었죠. 무슨 소리인지 도통 몰랐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쪼금, 아주 쪼금 알 것도 같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란 독일어로 Übermensch 입니다. 위버멘쉬란 ‘넘어가는 인간’이자 ‘극복하는 인간’입니다. 초인의 삶은 주인으로서의 삶입니다. 자신이 결정권을 가진 주체적인 인간을 말합니다.

그리고 “영원회귀”란 이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들은 유한하고 시간은 무한하기 때문에, 무한한 시간 속에서 유한한 물질의 조합은 계속 반복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은 결정론적인 세계입니다. 초인이 가진 절대적인 자유와 선택의 의지를 제약합니다. 여기에서 초인과 영원회귀 사상에 모순이 발생합니다.

초인과 영원회귀 이 두 가지가 <차라투스투라>의 중심 개념인데 모순이 생기면 안 되죠. 그래서 차라투스투라는 “내가 원한다”고 말함으로써 이 모순을 해결합니다. 자신이 원치 않는 세계가 반복된다면 자신은 예속된 것이지만, 자신이 반복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예속이 아닌 것이지요.

지나간 과거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지나 간 과거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내가 원했어”라고 한다면, 그건 자기 운명에 대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모르파티 (amor fati), 운명에 대한 사랑인 것이지요.

아 이렇게 명확하게 니체 철학을 설명해 주시다니, 저자님께 너무 너무 감사드리고 싶네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작가와 작품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최후의 유혹>, 서머싯 모옴의 <달과 6펜스>, <인생의 베일>, <면도날>, 그리고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입니다.

이 중에서 저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해석이 가장 흥미로웠는데요, 쿤데라가 이 작품에서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단 한번 뿐인 삶에 반복되는 삶인 영원회귀를 붙여 놓으면, 단 한번 뿐인 삶은 갑자기 새롭게 규정이 됩니다. 영원회귀가 너무 무겁기 때문에 일회적인 삶은 너무 가벼워집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언제 읽었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오래전에 읽었었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도 읽어보고 싶고요, 모옴 책은 한 권도 못 읽어 봤는데, 모옴 책들도 읽어 봐야겠구요.
읽어야 할 책 목록만 자꾸 자꾸 늘어납니다.

어째 저 개인적으로는 영원회귀 개념과는 반대로 시간이 무한한 게 아니라, 시간은 유한한데 물질적인 할 일이 무한한 느낌이죠? ㅎㅎ.
아니면 이런 상태가 무한히 반복 되는건가? 미궁이로군요.
아 역시… 이해한 줄 알았는데,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었던 것이군요. 무한회귀란.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을 읽고

오늘은 지금 막 다 읽은 책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생화학자이자 서울시립과학관 관장님이신 이정모님이십니다.

이 분을 처음 알게 된 건 <판타스틱 과학책장>이라는 책 덕분이었는데, 글이 얼마나 재밌는지 생전 관심이 1도 없었던 공룡에 관심을 가지게 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과학하고 앉아있네> 시리즈 중 제 1권 <이정모의 공룡과 자연사>까지 읽었더랬죠. ^^

그러니 지금 소개하려는 이 책을 제가 다음 순서로 읽은 건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생물이나, 우주의 행성, 자연의 법칙 등에 대해서 자신의 개인적 경험까지 곁들여가며 어렵지 않게 설명해 준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입니다.
거기에 더해 마무리 부분에서는 우리나라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일침 한방씩 날려주시는데 심각한 방식이 아니라 매우 유머러스하게 날리시기 때문에 통쾌하기도 하고 반성하게 되기도 하는 반전의 재미가 있습니다.

서문에는 “과학은 삶의 태도다” 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칼 세이건은 “과학은 단순히 지식의 집합이 아니다. 과학은 생각하는 방법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도 같은 의미로 “과학은 지식의 집합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사고방식”이라고 했고요.
과학이 삶의 태도 혹은 생각하는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모두는 과학적으로 살아야겠지요.
그게 우리 사회가 합리적인 사회가 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합리적인 길일 것입니다.

책 본문 중에는 논어의 말씀 한 구절이 인용됩니다.
“믿음을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남을 해롭게 한다.”
(호신불호학(好信不好學)이면 기폐야적(其蔽也賊)이라.)
믿기만 좋아하고 그에 대해 공부하지 않으면, 그게 바로 사회의 문제가 된다는 뜻이겠지요.

공부의 시작은 자기 믿음이나 사회의 믿음에 대한 의심 혹은 의문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의심하고 의심하고 의심하라.
그게 공부의 시작이고, 그게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무기이고, 또 과학적인 태도이고, 바른 삶의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의심하고 질문하기를 좋아하는 저는 역시 어쩔 수 없는 회의주의자인가 봅니다.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중 “12월의 열쇠”를 읽고

향후 며칠간은 제가 읽고 있는 책들에 대해 써보려고 합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로저 젤라즈니의 SF 중단편 소설집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입니다.
SF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완전히 생소한 분야였는데, 요즘은 관심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시작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였고, 저의 관심 폭발을 유도한 책은 테트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였습니다. SF의 진정한 맛을 알게 해 줬다고나 할까요?
로저 젤라즈니가 이 책을 낸 게 1971년이니까, 이 분을 SF계의 근 조상님이라고 해도 좋을 듯 합니다. 원 조상님은 당연히 <프랑켄슈타인>을 쓰신 메리 셸리 님 이시고요. ^^

책을 아직 다 읽은 게 아니기 때문에, 전체적인 소개를 할 수는 없고요.
소설집에 첫 번째로 실려 있는 <12월의 열쇠>라는 작품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도록 할게요.

주인공인 쟈리는 고양이 형태로 태어났습니다. 한랭 식민지 행성에서 일할 사람으로 태어날 때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주 추운 곳에서만 살 수 있는 몸이었지요. 하지만 한랭 행성이 신성폭발로 사라져버리고, 쟈리와 같은 2만 8천 5백 66명의 고양이 형태 인간들은 지구에 남아 극저온 메탄 탱크 안에서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쟈리는 자기 동료들과 연합하여 새로운 행성을 구입합니다. 그곳을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만들고자 한 것이죠. 행성을 냉각시킬 수 있는 행성 개조 유닛을 20대 설치하고 자신들이 살 수 있는 상태로 행성이 개조될 때까지 3000년간 냉동수면에 들어갑니다. 그 동안은 250년마다 한 번씩 깨어 당직을 서야하고요.
별은 점점 차가워지고, 쟈리는 250년 만에 한 번씩 깨어나서 원래 그곳에 살던 생물들이 차가운 기온에 적응하지 못하고 하나하나씩 멸종을 향해 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특이한 두 발 짐승 한 종이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남으려 변하는 모습을 보고, 쟈리는 그 종이 지적인 생명체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가 정찰 중에 큰 곰에게 습격당하는 그 동물들을 도와줍니다. 그 사건 이후, 쟈리 일행이 이 행성이 도착한 지 15세기가 흐른 후, 다시 당직을 서던 쟈리는 그 두발 짐승이 사는 마을에서 고양이 형태의 신을 섬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자신을 신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이었죠. 쟈리는 결심합니다. 자신을 섬기는 그들이 결코 멸종으로 사라지게 하지는 않겠다고….
쟈리는 동료들과의 전투도 마다하지 않고, 결국 기온을 더 천천히 낮추기 위해 동면기간을 원래의 3천년에서 7- 8천년으로 더 늘리게 됩니다. 그 동물들에게 적응할 수 있는 기간을 더 주기 위해서죠.
그리고 쟈리는 더 이상 동면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 동물종의 신이 되어서요.

새로운 행성의 신은 어떻게 생기게 되었나? 하는 일종의 신화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도 외계인 문명설 같은 이야기가 끊임없이 회자되지 않습니까? 신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은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이야기를 신의 이야기보다는 생존의 이야기, 적응의 이야기로 보았습니다. 신이 된 쟈리의 관점이 아니라 살아남으려는 쟈리와 또 살아남으려는 두발 동물들의 이야기로요.
지구에서 살 수 없었던 쟈리는 살기 위해 새로운 행성을 이주를 합니다. 하지만 그 고양이 형태 인간들 덕에 행성은 점점 차가워지고, 이렇게 변해가는 환경 속에서 다른 동물과 식물들은 적응하지 못하고 멸종해갔지요. 하지만 두발 짐승 종족은 추위를 이기려고 불을 피우고, 추위를 이기려고 동물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을 정도로 지능을 진화시킵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생명은, 자신에게 충분히 봉사한 자들에게 보답하는 것이다.”
이 문장에 대한 해석이야 어려가지로 할 수 있겠지만, 저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해석하고 싶어요. 살아남고자 했던 쟈리가 신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살아남으려고 했던 두발 종족이 멸종을 피할 수 있었던 것처럼요.

이순신 장군님은 “생즉사, 사즉생”이라고 하셨고, 그 깊은 뜻이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지금 저는 “생즉생, 사즉사”라고 말하고 싶네요.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를 읽고

어제 막 다 읽은 따끈 따끈한 글이 너무 좋아서 여기에 소개를 해 보고 싶습니다.
소개 하고 싶은 책은 우치다 타쓰루의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입니다.
이 책은 교수인 저자가 은퇴하기 직전 마지막 학기에 ‘창조적 글쓰기’라는 강의에서 했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불문학자답게 소쉬르나 롤랑 바르트, 부르디외 등 프랑스어권 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해석하고 있고, 또 하루키 문학의 세계문학성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내용은 번역본의 제목대로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에 대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는 마지막 장에 실린 한 단락이 이 책 내용을 대표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번 인용해 보도록 하지요.

“이 강의에서는 몇몇 주제를 임의대로 제시했는데, 그중 하나가 ‘언어가 전해지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수사적으로 아름답다든가 논리적이라든가 내용이 정치적으로 옳다는 차원과 관계없이 ‘전해지는 언어’와 ‘전해지지 않는 언어’가 있습니다. 아무리 비논리적이라도, 아무리 알아듣기 어려워도, 모르는 말이 많이 있어도, ‘전해지는 말’은 전해집니다. 어떤 언어든 뜻이 명료하고 문법적으로 정확하고 아름다운 운율을 실어 말한다고 해도, ‘전해지지 않는 말’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를까요?

차이는 바로 하나뿐입니다. ‘전해지는 언어’에는 ‘전하고 싶다’는 발언자의 절박함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에게, 가능하면 정확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싶다는 필사적인 마음이 언어를 움직입니다. 뜻하지도 않은 곳까지 언어가 닿도록 합니다.“

 

위의 내용과 연관해서, 제가 가장 감명 깊에 읽은 부분은 9강에 나오는 ‘메타 메시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메타 메시지는 메시지를 읽는 법을 지시하는 메시지를 뜻합니다. 이야기의 내용 보다는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전하는 방식이죠.
저자는 아가들의 예와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아가들은 어릴 때 엄마가 하는 말의 내용은 알아듣지 못해도, 엄마가 자기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알아들을 수가 있지요.
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예를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신의 언어는 비언어적 기호를 통해 전해집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도래했고, 아브라함은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이 언어의 수신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나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죠.
결국 메타 메시지는 수신자가 있는 메시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수신자가 그 메시지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온 것이라고 받아들일 때, 메시지는 강력한 영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발언자의 전하고 싶다는 절박함이 수신자에게 가 닿아 ‘나에게 보낸 메시지로구나’하고 받아들여질 때, 그 메시지는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저의 글쓰기는 배설의 기능이 강했습니다. 말하자면 대상을 상정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나 오다가다 보겠지 하는 정도. 아니면 우연히 지나가다 읽을 누군가를 막연하게 상정했거나.
그동안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들었으니, 이젠 좀 뱉어내야겠다. 혹은 마음의 응어리들을 글로 풀어야겠다는 수준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읽는다면 좋겠지만 안 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고, 그게 글쓰기의 부담을 갖지 않는 좋은 마음가짐이라고 여기기까지 했었죠.

이 책을 읽고 나니 글쓰기에 대해 고민이 많아지네요.
배설해서 우주에 흩어버리는 글쓰기가 아니라 수신자를 상정하는 글쓰기.
내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닿길 바란다는 것은 어떠한 목적이 있다는 뜻이고, 목적이 있다는 것은 내 글이 일으킬 결과 -소소한 결과라 할지라도- 에 대한 책임감의 문제를 야기하게 되겠죠.
그 동안은 가벼운 글쓰기였는데, 갑자기 무거워졌어요.
그렇지만 나는 초보니까 일단은 나와 내 주변을 제1수신자로 삼아보겠어요. 아직은 소심하니까요.
차근차근 수신자를 늘려보도록 하지요.

(책 요약) 사람, 장소, 환대

업데이트가 너무 없어서, 예전에  <사람, 장소, 환대> 요약해 둔 것을 좀 풀어놓을게요.

관심있으시면, 나중에 꼭 책을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진짜로 강추하고 싶은 책이고요, 다른 책에서도 인용이 많이 되는 책입니다.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저, 문학과지성사, 2015

1장 사람의 개념
사람 대 인간
인간이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다. 그러나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 성원권을 가져야 한다. 즉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태아
태아는 법적으로나 관습적으로나 사회 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태아의 시신은 특수폐기물)

노예
노예는 얼굴, 이름이 없으며,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얼굴이 없다는 것은 체면이나 명예가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사회성원간의 상호작용 의례에서 제외되므로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그가 태생적으로 소외된 존재임을 알린다. 이는 그를 인정해 줄 친족집단이 없기 때문.
그리고 노예는 법률행위의 주체가 될 수 없으므로 사람이 아니라 물건으로 규정된다.
페터슨은 노예를 권력이 없고, 친족이 없고, 명예가 없는 자,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군인
현대전에서 병사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다. 전시에 적군을 죽이는 것이 ‘인권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살인이 아니기 때문에)
전쟁이라는 게임 속에서, 적대하는 두 국가는 각각 인구의 일정부분을 차출하여 그들로부터 사람의 지위를 빼앗고, 총알이나 포탄과 같은 소모품으로 만들어 버린다. 군인은 어떤 의미에서 죽어있는 존재로 강등되어있는 자이다.

사형수
로크 : 다른 이의 생명, 자유, 재산을 침해한 자는 자연법을 위반했기에 자연적 공동체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잃는다. 즉, 전 인류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 셈이기 때문에 호랑이나 사자처럼 살해되어 마땅하다. 이에 대한 의미는 두 가지로, 우선 사형수는 죽기 전에 이미 사람자격을 박탈당하고 물건의 지위로 떨어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범죄자의 처형이 전쟁터에서 적을 죽이는 행위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2장 성원권과 인정투쟁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것, 즉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는 ‘현상공간’으로, 타인이 나에게 ‘현상한다’는 말은 그가 나의 ‘상호작용의 지평 안에 있다’는 말과 같다. 사회의 경계는 이 나날의 인정투쟁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그어진다.

주인과 노예
주인들은 복수의 존재이다(우리). 주인들끼리는 상호인정 상태이고, 노예는 인정투쟁 장의 외부를 상징한다.
패터슨 :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존재가 중요하다. 타이모크라시(명예에 집착하는 문화)에서는 노예제 사회 내의 자유인들이 명예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이는 몰락하고 명예를 읽은 인간은 노예와 비슷해지기 때문이다.
인정투쟁의 장 외부를 구성하는 노예의 존재는 이 투쟁을 생사를 건 싸움의 경지로 끌어올린다. (남부인들의 자유에 대한 사랑. 평등의 감정 -그들이 노예가 아니라는 사실에 기초를 둔 정체성)
결론적으로 인정투쟁이 지향하는 타자는 적이 아니라 우리이다. 즉, 인정투쟁은 성원권 투쟁이다.

외국인의 문제
외국인이라는 꼬리표는 스티그마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외국인이 그 자체로 낙인찍힌 범주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이상적인 외국인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한에서이다. (돈 많고 교양 있고 “원더풀”이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
외국인에게 주어지는 환대 혹은 사회적 성원권은 조건적이다.
외국인에 대한 환대의 철회는 그들에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에 의해 정당화된다.
그러나 그 장소는 종종 허구적인 것으로 밝혀진다(예. 재일조선인들의 ‘조선’, 남아프리카 공화국 원주민들의 ‘홈랜드’인 반투스탄).

오염의 메타포
왜 어떤 범주의 사람들- 흑인, 재일조선인, 불가촉천민 등등-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럽다고 여겨지는가?
더글러스 :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원권의 문제는 분류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이며, 인식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학의 문제이다. 여성의 사회적 성원권을 부정하면서도, 음양론에 의거하여 여성과 남성에 대해 대칭적이고 상호보완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좋은 예이다. 가부장제도 하에서 여성은 사회 안에 어떤 적법한 자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여성은 단지 스스로를 비가시화 한다는 조건으로, 물리적인 의미에서 사회 안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받고 있을 뿐이다. 여성이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사회는 여성이 잘못된 장소에 있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여성이 존재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깨끗한 여성이란 보이지 않는 여성이다.
깨끗한 여성과 더러운 여성의 차이는 노예와 아웃카스트의 차이와 비슷하다. 아웃카스트와 달리 노예는 더럽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노예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3장 사람의 연기/수행
사람이 수행적 이라는 것은 사람다움이 우리 안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사람다움은 우리에게 있다고 여겨지며,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는 체하는 어떤 것, 서로가 서로의 연극을 믿어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어떤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본질을 갖지 않는 현상이다.

가면과 얼굴
고프먼은 사회적 공연에 배우로도 관객으로도 참여하지 않으며 같은 공간 안에 있으면서도 거기 있지 않다고 여겨지는 사람에 대해 비인격 이라는 단어를 쓴다. 비인격의 고전적인 유형은 하인이다.
비인격의 다른 유형은 택시운전사이다. 그러나 이 경우 비가시화가 인격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직무에서 벗어나는 순간 가시성을 회복하기 때문이다. 고프먼은 비인격 이라는 범주를 사회적. 법적 성원권의 상실과 연관시키지 않고 순수하게 연극적인 맥락에서 사용한다. 우리는 인격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현상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사람이란 곧 연기자를 말하는데, 우리는 사회라는 무대 위에 올라가서 실제로 연기를 하면서 우리의 사람자격을 확인받게 된다.
사람person이라는 단어의 첫 번째 의미는 가면mask 이다.
가면이 우리 인격의 일부이며 우리는 가면을 씀으로써, 즉 어떤 역할 또는 성격을 연기함으로써 비로소 사람이 된다.
얼굴과 가면은 다른데, 가면 뒤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얼굴은 신성한 것 또는 명예이다. 신성함은 의례를 통해 확립되고 재생산된다. 어떤 사람의 연기가 맘에 안 들고, 그가 만들어 내는 것이 가면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그 가면을 굳이 벗기려하지 않을 때, 그가 가면을 완성하도록 도와주고, 실수로 가면이 벗겨져도 못 본체할 때, 그의 가면 뒤에 있는 신성한 것에 경의를 표할 때 그 사람은 얼굴을 갖게 된다.

명예와 존엄
버거 : 우리는 명예의 세계를 떠나 존엄의 세계로 옮겨왔다. 명예는 그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주어지지만, 존엄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명예의 세계: 위계(신분), 옷을 입은 인간, 공적 공간(전쟁터), 규범, 위치감각
존엄의 세계: 평등, 벌거벗은 인간, 사적 공간(침대), 자유, 좌표 상실
그러나 존엄 역시 문화적인 관념이며, 사회적인 의례를 통해 재생산된다. 버거의 개념으로는 모욕은 (존엄이 아닌) 명예에 대한 공격으로만 이해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모욕은 여전히 중요한 공적의제이다. 민권운동에서 게이-레즈비언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체성 투쟁의 핵심에는 모욕에 대한 저항이 있다. 모욕은 존엄을 공격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무너뜨린다. (배타적 민족주의 운동, 파시즘은 배제하고자 하는 집단을 공공연히 모욕하는데서 출발)
모욕을 더 포괄적으로 정의하려면 그것을 존엄과 연관시키면서도, 감정처럼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처럼 객관적으로 기술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상호작용 의례에 대한 고프먼의 논의는 이러한 접근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4장 모욕의 의미
의례의 교환은 단절의 계기들-즉 모욕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현대사회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동등한 인격을 부여하는데, 이는 한편으로 법 앞에서의 평등으로 나타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의례교환의 대칭성을 통해 확인된다. 하지만 낙인과 수용소에 대한 고프먼의 연구는 사회가 그 내부에 일체의 존중의 의례가 사라지는 예외지대를 마련해 두고 있으며, 특정한 범주의 사람들에게 비정상의 낙인을 찍어서 배제와 조건부 통합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고 있음을 고발한다.

인격에 대한 의례
고프먼은 상호작용 질서가 개인들이 대면접촉상황에서 수행하는 상호작용 의례를 통해 표현되고 유지된다고 보았다. 상호작용 의례를 행하는 것은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에서의 그의 성원권을 인정하는 의미가 있다. 역으로 의례적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은 상대방이 한 명의 온전한 사람임을 부인하는 일이자, 그의 성원 자격에 대한 부정이다.

배제와 낙인
고프먼의 『수용소』 : 정신병원, 수도원, 교도소, 병영 등 총체적 시설이라 명명된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세밀하게 기술한다.
재소자의 인격은 의도적이건 아니건 체계적으로 모독된다. 직원은 재소자의 인격을 말살하여 다루기 쉬운 ‘재료’로 만들어야 한다.
『스티그마』 : 불안정하게 통합된 사람들, 즉 낙인찍힌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다. 사회의 낙인으로 취급되는 속성들 (1)신체의 괴물스러움, (2)정신적인 면에서의 결함, (3)특정한 인종, 민족, 종교에 속해 있다는 사실
낙인자와 정상인의 만남은 어떤 종류의 기만을 수반하곤 한다. 낙인자를 대상으로 한 사회통합 의례- 고아들에게 키스하는 연예인 등등-가 이를 보여준다. 정상인들은 낙인자들의 몸을 함부로 만질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하고, 낙인자의 편에서는 이러한 접근을 허용하는 것이 일종의 의무이다.

신분과 모욕
모욕이 의례적 질서의 일부를 이루고 있을 때, 즉 의례 코드 자체가 비대칭성을 띨 때 이는 그 사회에 신분 차별이 존재한다는 표시로 해석될 수 있다. 신분이란 어떤 위계화된 구조 안에 있는 고정된 위치들이 아니라 무리 짓고, 사회공간을 점유하고 경계를 만들며, 배제하거나 포함시키고 자리를 주거나 뺏는 어떤 운동의 효과이다. 그러므로 신분의 개념은 인정투쟁이나 타자화의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사회의 발견
개인들이 신분과 무관하게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집단적 의례 및 상호작용 의례가 신분적 의례를 압도할 때, 사회에 대한 상상은 비로소 그 구성원들의 의식 속에 확고하게 뿌리 내린다.
신분을 법적인 관점에서만 정의할 경우, 현대사회에는 신분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베버는 신분을 사회적 위신과 사교 생활을 중심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정의함으로써, 현대사회에도 신분질서가 존재함을 시사한다.

굴욕에 대하여
신자유주의 하에서 모욕은 흔히 굴욕의 모습을 띤다. 이론적으로 모욕은 구조가 아니라 상호작용의 질서에 속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누구도 나를 모욕하지 않았다면, 내가 느끼는 굴욕감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문제가 되며, 신자유주의 전도사들은 이것을 자존감의 결여 탓으로 돌린다. 신자유주의의 모순은 상호작용 질서의 차원에서(즉 상징적으로) 모든 인간의 존엄을 주장하면서, 구조의 차원에서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을 빼앗는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형식적으로는 평등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불평등하다.

5장 우정의 조건
인격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이 아닌 온화한 경멸 역시 상처를 준다. 자선은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므로, 그 안에 이미 상대방의 명예에 대한 평가절하가 들어있다.

순수한 우정과 순수한 선물
순순한 우정의 관념은 순수한 선물의 관념과 연결된다. 순수한 선물이란 경제적으로 의미를 갖지 않는 선물로, 물질적인 가치와 무관하게 상징적인 관점에서만 평가되는 선물을 말한다. 이는 경제활동과 선물 교환이 별 개의 영역이며, 개인들이 선물교환에 의지하지 않고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얼굴을 유지하려면 사교라고 불리는 명예가 걸린 게임에 참여할 수 있어야한다. 선물은 이 게임에 사용되는 화살이자 방패이다. 경제력을 상실한 사람은 이런 무기를 살 수 없으므로 자연스럽게 게임에서 탈락한다. 경제적인 소외가 이리하여 사회적인 소외로 이어진다.

가부장제를 보완하는 국가
“경제적 자율성에 기초한 자유로운 관계”라는 우정의 이상은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 혹은 타인의 경제력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제를 간과한다. 독자적인 소득이나 재산이 없는 전업주부가 대표적이고(A), 실직이나 파산 등으로 경제력을 상실한 사람(B)도 해당된다. 한국사회는 B와 같은 사람들을 특수한 범주로 분류하여 관리하면서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거나 혹은 효도나 돌봄 같은 전통적인 가치를 강조하면서 가족에게 짐을 떠넘긴다. 간단히 말하면 B와 같은 사람들을 일차적으로 A의 위치로 옮겨 놓으려 하며,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만 공적부조 시스템을 가동한다. 우리는 ‘가부장제를 보완하는 국가’라는 말로 이러한 시스템을 정의할 수 있다.
가부장제의 문제점은 피부양자-비대표자가 부양자-대표자에게 쉽게 인격적으로 종속된다는 것이다. 가부장제에서 여자와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성원권의 불완전함은 우정의 제약으로 이어진다. 우정은 남성적인 미덕이며, 주로 남성주체의 인격적 성숙이라는 테마와 결부된다.

증여와 환대
데리다 : 순수한 환대 혹은 절대적 환대는 불가능한 이상이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는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환대는 자원의 재분배를 포함하다.
증여 대 환대.
증여는 인정의 문제이다. 주는 행위를 증여로 구성하는 것은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의 관계에 대한 특정한 해석이다.
환대 역시 주는 행위이지만, 이것은 증여로 계산되지 않는다. 환대란 힘을 주는 것이며, 받는 사람을 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공동체에 관한 두 개의 상상
우정의 조건은 절대적 환대이다.
절대적 환대가 사적 공간의 무조건적이고 완전한 개방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데리다가 그랬듯이 그러한 환대가 과연 가능한지 자문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절대적 환대가 타자의 영토에 유폐되어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 그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일,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자리를 주는 일, 즉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회 안에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주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환대가 필요하며 또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환대는 우정이나 사랑 같은 단어가 의미를 갖기 위한 조건이다.
환대에 대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공공성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아동학대방지법, 청소년쉼터, 집 없는 사람에게 주거수당을 주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에게 실업수당을 주는 일)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라는 현대적인 이상은, 이러한 공공의 노력을 통해서 실현된다.

6장 절대적 환대
환대한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혹은 사회 안에 있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이다. 자리를 준다/인정한다는 것은 그 자리에 딸린 권리들을 준다/인정한다는 뜻이다. 또는 권리들을 주장할 권리는 인정한다는 것이다. 환대받음에 의해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또 권리들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된다.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는 현대사회의 기본적인 작동원리이다. 첫째 모든 인간은 출생과 더불어 사람이 된다. 둘째 공적 공간에서 모든 사람은 의례적으로 평등하다. 셋째 자기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다(정체성 서사의 최종편집권은 당사자에게 있다).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
절대적 환대는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이다. 이것은 환대가 면책 혹은 망각과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유교국가의 효와 충. 유교사회의 구성원들은 효와 충으로 사람다움을 증명하는 한에서, 조건부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의무와 빚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는 사회를 만들 수 없다.

복수하지 않는 환대
적대적인 상대방에 대해서도 환대가 지속되어야 한다. 환대란 어떤 사람이 인류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어떤 사람을 절대적으로 환대한다는 것은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처벌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그의 사람자격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우리가 한번도 절대적 환대의 사회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운동의 현재 속에 그런 사회는 언제나 이미 도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