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없는 땅, 유토피아 -문강형준의 “파국의 지형학”을 읽고

*본문은 책을 읽고 난 후의 감상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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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의 지형학” 요약

살아있는 유기체의 운명은 죽음을 향한다.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사회적 유기체로 여겨지는 문명이나 사회, 국가 등도 마찬가지의 운명을 지녔다. 생성되고, 발전 혹은 유지되다가 소멸하는 굴레. 고대문명사회의 멸망이나 로마제국의 쇠퇴, 사회주의 국가들의 해체 등 역사가 이를 보여주고 있다.

소멸을 향해 가는 사회는 모두 아포칼립스적 상황을 맞게 된다. 어쩌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역시 신자유주의적 질병을 앓고 스러져가는 파국의 상황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음울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저자는 현재의 파국의 상황이 오히려 유토피아로 갈 수 있는 기회임을 역설한다. 그는 여기에서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이 냉소와 허무주의이며, 냉소와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열정과 과잉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반-유토피아주의자이자 회의주의자인 존 그레이를 비판한다. 인간주의도 진보도 역사도 진리도 가치도 그레이에게는 모두 판타지에 불과하며, 세상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디자인하려는 ‘유토피아 기획’을 그는 혐오한다. 그는 유토피아의 대안으로 현실주의를 주장하는데, 미래에 대한 비전보다는 현재 발생 가능한 재난을 막는 데에 더 치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비판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내가 저자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이 학자의 의견에 몹시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강조하는 열정과 과잉의 가치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다만 그간 사회의 재난과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가 진일보하는 데 열정과 과잉이 기여한 바 크지만, 실제적으로 유토피아의 도래를 이끌어 낸 적이 있던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것이고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것이다.

회의주의자를 자처하는 나의 선택지는 결코 유토피아가 될 수는 없다. 유토피아를 이루는 사회 역시 하나의 유기체로서 생성 발전 유지 소멸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 파국의 기회를 잡자고 했지만 정작 본인이 어떤 형태의 유토피아를 꿈꾸는지 제시하지 않는다. 아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두 인정하는 한 가지 형태의 유토피아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군가에게는 유토피아가 누군가에게는 디스토피아 일 수 있다. 정작 신자유주의를 완전히 극복한 완벽히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가 도래한들 그 사회에 영원히 균열이 발생하지 않을까? 균열이 발생한다면 그 결과는 결국 파국일 것이다.

어쩌면 인류가 생겨난 이래 우리의 삶은 늘 파국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갈라진 곳을 메꾸고 봉합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왔다. 파국은 또 다른 사회를 만들었지만 그 사회 역시 또 파국을 맞이했다. 편안하고 아름답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은 결국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땅, 바로 유토피아일 뿐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유토피아를 막연하게나마 그려보면 과연 그곳에서 내가 행복할지 의문이 든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플라톤의 이상국가,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후의 공산주의 사회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꿈꾸는 우파 유토피아. 나는 그 어디에서도 절대로 살고 싶지 않다. 계시록의 아마겟돈 이후 천년왕국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듯 저자에게 철저히 동의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너무 재미있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읽었다. 주변 지인들에게 추천까지 했다. 저자가 이야기를 끝말잇기처럼 자연스럽게 끌어가고, 중간에 유명한 철학자들의 사상도 쉽게 소개해주고, 영화나 소설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지루하지 않게 배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을 위해서는 최고로 친절하고 다정한 저자라고 할 만 하다.

(책 요약) 파국의 지형학

(*전에 읽은 책인데 독서모임 발표 자료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파국의 지형학
문강형준 저, 자음과 모음, 2011

1. 늑대의 시간의 도래 : 파국의 지형학을 위한 서설

파국의 디스토피아 감성은 대중문화에 의해 가장 먼저 포착된다. <2012>는 마야문명이 예고한 지구멸망의 시기인 2012년 12월의 이야기를, <팬도럼>과 <아바타>는 지원의 자원부족으로 새로운 행성을 탐사하는 이야기를, <더 로드>는 지구 재앙 이후 생존한 아버지와 아들이 길을 떠나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 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여 지는 코드는 바로 파국이다. 문제는 이 영화들이 그리는 디스토피아적 상황을 우리 역시 지금 여기에서 목격하고 또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폐허, 아이티의 죽음과 혼란, 용산의 폭력, 실업자와 노숙자의 절망 등. 하지만 어떤 이들의 디스토피아는 어떤 이들에게는 유토피아로 감지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에서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역사적 실험이 폐기되고, 이제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의 최종적 성공이 확실시 된다고 판단한다. 인류의 보편적 역사가 제 몫을 다 한 후 드디어 더 이상의 변종을 기대하기 힘든 상태, 즉 ‘역사의 종말’을 맞이한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나 후쿠야마 테제의 결정적 오류는 미국식 ‘자유주의’의 승리를 헤겔과 마르크스의 ‘자유의 승리’와 동일시한 데 있다. 그가 말하는 ‘종말’은 곧 ‘자본주의 유토피아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본의 유토피아 이면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결국 파국의 기미, 디스토피아 감성을 촉발하는 시발점이 된다. 후쿠야마의 승리가 자유의 영역을 확보한 것과는 전혀 상관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시 우리에게 남은 것은 필요의 영역이다. 현재 이 필요의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이념 역시 자본주의다. 그리고 이 자본주의의 지배가 작동하는 근본원리 중 하나는 ‘희소성’이다. 희소성을 사회적 조건으로 안고 사는 이 시대를 뒤바꿀 수 있는 투쟁은 과연 가능할까? 이에 대해 조르주 소렐은 대참사를 주장했고, 레닌은 억압자에 대한 폭력만이 유일한 대응책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폭력은 기존체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수단이 된다. 그런데 과연 이 시대에 그러한 폭력이 어떻게 가능할까? 장준환 감독은 영화 <지구를 지켜라>에서 폭력을 통한 억압자에 대한 약자의 저항이 어떤 좌절을 겪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 강 사장은 말한다. “너희들은 날 못 이겨.” 이 영화에서는 ‘국가’가 실종되어 있다. 자본가의 악행 뒤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국가가 있다. 국가는 사라지고 사회는 녹아내리고(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액체의 시대) 남는 것은 개인의 ‘각개격파’뿐이다. 이는 근대의 ‘사회계약’ 상태가 해체되고 다시 ‘모두가 모두에게 늑대가 되는’ 홉스적인 무한 투쟁의 상태로 퇴보함을 뜻한다. 바우만이 우리의 시대를 ‘사냥꾼의 시대’에 비유하는 것 역시 이런 의미이다. 이 시대를 떠도는 디스토피아적 감성의 핵심적 ‘랑그’는 무엇일까? 거기에 ‘늑대의 시간의 도래’라고 이름붙이고자 한다.

2. 무의미의 무한연쇄 : 악과 무

버나드 맨더빌은 선과 악의 역설적 관계를 꿀벌의 우화를 통해 보여준다. 커다랗고 풍요로운 벌집은 이곳의 구성원들이 서로 기만하고 뇌물을 먹이고 사치함으로써 전체적으로 풍요와 고용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러니 이 벌집에도 순수한 덕과 선을 요구하는 불만들이 터져 나왔고, 신은 이들이 원하는 대로 정직함만을 불어 넣는다. 그러자 덕과 선으로 충만해진 이곳에는 번영이 사라지고 지루하고 단순함만이 남는다. 결국 악에 대한 극단적 거부는 벌집 자체의 폐기로 마무리 된다. 이러한 사고는 자유주의 경제학의 원리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는 맨더빌이 예견한 풍요와 번영을 지나 벌집에 팽배한 악에 의해 파국이 예견되는 세계가 되었다. 그런데 도대체 악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악에 대해 생각할 때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는 사탄의 형상이다. 밀턴의 <실낙원>에 등장하는 사탄이 신에 대항하는 전략은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뒤바꿔버리는 것이다. 신이 창조의 존재라면 악은 파괴와 관련되어 있다. 밀란 쿤데라 역시 천사성은 의미가 지나치게 넘쳐나는 것, 악마성은 모든 의미의 완전한 상실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무’와 ‘파괴’로 행하는 이 악의 속성은 오늘날의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가장 적절히 구현되고 있다. ‘사용’가치가 사라진 곳에서는 ‘의미’ 역시 사라진다. 더 나은 무언가를 위해 무한히 현재의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교환하지만 그 더 나은 무언가는 영원히 당신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지푸라기 개의 비유가 등장한다.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지푸라기 개처럼 다룬다. 성인은 어질지 않아서 백성을 지푸라기 개처럼 다룬다.” 고대 중국인은 제사를 드리면서 지푸라기 개를 바쳤는데, 제사 중에는 예를 다해 이 인형을 모시지만 제사가 끝나면 내던져서 발로 밟았다고 한다. 존 그레이는 “인간들도 지푸라기 개들과 다를 바 없다”는 시각을 갖는다. 그레이는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 대신 호모 라피엔스(파괴하는 인간)이라고 칭한다. 그레이의 인간관이 겨냥하는 목표는 인간주의 그 자체이다. 인간주의도 진보도 역사도 진리도 가치도 그레이에게는 모두 판타지에 불과하며, 세상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디자인하려는 ‘유토피아 기획’을 혐오한다. 그레이가 자신의 철학의 결론으로 삼는 ‘의미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곧 ‘무의미에의 지향’이다. 만약 악이 의미/창조에 대한 적극적 파괴라면, 그레이의 무의미와 무도덕은 적극적 악을 가능케 하는 조력자와도 같을 것이다. 모든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거부가 가져오는 최종적인 상태가 파국의 실현, 곧 ‘늑대의 시간’이 아니겠는가. 의미의 깨짐, 가치의 붕괴, 무의미의 연쇄로만 이어진 이 거대한 무. 그러나 모든 진정한 파국은 불가능성만이 아니라 가능성도 함께 끌고 들어온다. 그러한 파국은 그레이의 무관심이 아니라 <안티고네>의 죽음충동을 통해서 올 것이다. 오직 무의미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어떤 고귀함을 지향하는 강력한 하나의 의미가 그녀의 결단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맞이하는 파국은 기존 세계를 넘어선 더 큰 세상의 창조로 이어질 수 있다.

3. 어긋난 시간 : 유토피아 테마에 의한 네 개의 변주곡

아포칼립스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운 이 파국의 시대에 오비디우스의 ‘황금의 시대’와 중세 말기 유럽에 퍼졌던 천년왕국운동, 토마스 뮌처의 독일 농노전쟁, 그리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 등. 이미 지나간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들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유토피아적 기획이 아포칼립스를 앞당긴다는 그레이의 대표적인 반-유토피아적 주장이 있으나, 뒤집어본다면 곧 아포칼립스의 시기야말로 언제나 유토피아적 열정이 가장 충만하게 터져 나온 때였다. 천년왕국운동에 가담했던 농노들이 천년왕국을 실제로 믿었던 것은 이들의 어리석음과 광신성, 즉 자신들이 살던 시대와의 비동시성과 시대착오성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이 비동시성과 시대착오성이 있었기에 이들은 권력자와 부자들의 억압과 착취에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유토피아적 열정의 비동시성과 시대착오성은 과잉일 수 밖 에 없다. 이 과잉의 성격이 없다면 그 어떤 싸움도 혁명도 불가능할 것이다. 모든 파국은 유토피아의 계기를 만들어낸다. 중요한 것은 그 계기를 놓치지 않는 일이다. 설사 실패하여 모든 것이 조각난다 하더라도 그 조각난 어제가 반드시 되살아나 그 조각으로 시스템을 찢는 지금이 언젠가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4. 두려움과 떨림: 최후의 인간을 넘어설 역설의 문화정치

최근 슬라보예 지젝은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을 1990년대 할리우드 유토피아라고 풍자하면서 2001년의 9.11과 2008년 경제위기가 미국식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의 몰락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의 헤게모니의 몰락 신호가 열어젖히는 공백기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기회를 만들어 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하지만 좌파는 글로벌 자본주의를 악마로, 자신을 천사로 인식하기 전에 그 어떠한 유토피아적 기획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시대의 회의주의와 냉소주의에 대응해야만 한다. 회의와 냉소의 태토를 가장 먼저 발견하고 예견한 이는 니체였다. ‘최후의 인간’이라는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최후의 인간은 창조적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창조적으로 상상하지 못하며, 그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 대한 열망이 없는 사람이다. 후쿠야마는 이 최후의 인간이라는 레토릭을 전유한다. 그에게 최후의 인간은 소시민이며, 그 모델은 미국의 중산층이다. 거대한 역사적 격변의 시절을 살지 않아도 되는 이들에게 투쟁이나 스릴, 도전과 고통 등의 요소는 사라진다. 삶은 작은 쾌락들과 안전장치로 이루어지고 권태로워진다. 이에 대해 후쿠야마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이 창업가 정신, 이노베이션, 민주정치제도, 스포츠화 엔터테인먼트 등을 통해 인간의 열정과 투쟁의지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키에르케고르는 <두려움과 떨림>에서 인간의 위대한 열정을 다르게 바라보고 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신에게 아들을 바치려한 일화는 역설로 가득 차 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주지 않으면 가장 소중한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역설. 이러한 신앙 속에서만 인간의 열정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과 니체의 위버멘쉬는 완전히 다르면서도 완전히 같다. 모두가 싸구려 쾌락에 빠져있을 때 이 둘은 모두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한 발짝 전진한다. 후쿠야마식 최후의 인간은 열정에 따르는 고통을 삭제하고, 그 열정이 필연적으로 향할 수 밖 에 없는 ‘역설적 상황’을 거세한 후 등장한다. 우리가 키에르케고르를 통해 찾아낼 것은 바로 역설 속에서만 열정이 가능하다는 지혜다. 즐거움은 두려움과 떨림을 동반한 개별자의 지난한 고통을 통과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고, 그렇게 얻은 즐거움은 그 자체로 혁명이다. 역설의 지혜를 통해 ‘즐거움’과 ‘혁명’을 새롭게 전유하는 방법을 사고하는 것이 오늘날 좌파 문화정치가 고민해야 할 과제이다.

5. 아포칼립스 나우: 파국 시대의 윤리를 위하여

일상적으로 아포칼립스는 파국적 사건을 가리키지만, 성서적 의미에서는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는 사건이다. 하늘의 비밀이 세상의 끝에 이르러 만천하에 드러나는 사건이다. 대다수 인간에게 파국이 될 이 사건은 그러나 선택된 이들에게는 구원이 된다. 아포칼립스적 상상과 결합한 유토피아적 열망을 바라보는 데에는 두 가지 상반된 시선이 있다. 하나는 유토피아적 열망이 인류에 치명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유토피아에 대한 열정은 자체가 새로움을 가능케 한다는 입장이다. 전자의 입장을 취하는 대표적인 이는 존 그레이이다. 그는 <검은 미사>에서 서양의 근대를 유토피아주의가 만들어낸 폭력으로 점철된 비극의 역사로 자리매김한다. 그에게 근대 정치는 종교(기독교)의 부속물이며, 이 둘이 공유하는 속성은 신앙에 기반을 둔 유토피아주의이다. 즉 종교(기독교)=정치=유토피아주의라는 등식이 성립하며 그 결과는 폭력과 무질서, 비합리와 광기의 아수라장, 곧 세계의 파괴가 된다. 그는 종교정치의 목록에 신자유주의도 포함시킨다. 소련의 붕괴로 영미의 우파를 중심으로 하는 신보수주의의 흐름이 복음주의 기독교와 연합하여 새로운 우파 유토피아로 재탄생했다고 분석한다. 그레이는 신자유주의의 실패가 확실시된 지금 이 유토피아의 믿음, 아포칼립스의 믿음은 죽었다고 선언한다. 그레이는 이에 대한 자신의 대안으로 현실주의를 주장하는데, 이는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갖지 않으며, 인간과 역사의 여러 윤리적 딜레마들이 절대 해결될 수 없다고 보는 이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반복되는 재난을 막는다는 데에 있으며, 각각의 상황이 가진 악들 중에 차악을 선택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어떤 면에서 전형적인 회의주의적 사유이다. 그레이의 현실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알베르노 토스카노는 광신에 대해 재해석을 시도한다. 광신은 대개 추상과 보편, 그리고 평등을 그 요소로 갖는다. 이러한 광신의 요소가 정치적 불만과 결합할 때 그것은 혁명을 만들어낸다. 토스카노는 그레이처럼 모든 열정을 위험으로 생각하는 시각 자체가 정치의 죽음이자 아포칼립스적 현실의 막다른 골목이 배태한 사유라고 보면서 모든 정치적 시도는 열정과 광신에서 나오지 않는 게 없음을 증명한다. 토스카노가 말하는 광신은 보편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의 사상을 가졌던 프랑스 혁명이나.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하고 전 세계 노동자들의 해방을 염원했던 마르크스주의 등은 비록 그것이 실패했다손 치더라도 의미 있는 사건이 된다. 유토피아적 열정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레이의 현실주의적 접근을 보조적 사유로 사용한다면 그 열정의 과정을 적절하고 유의미하게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으로 열정을 거세한 그레이의 현실주의가 세상의 딜레마를 푸는 방식으로 전유된다면 오히려 유토피아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는 파국의 시간 속에서도 되돌아오는 과잉에 대한 이야기다. 클론인 주인공들이 죽음의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면서도 사랑을 증명하려는 행위, 바로 그 ‘과잉’의 행위. 그것이 바로 인간적인 것이다. 어쩌면 아포칼립스의 시간이 진정으로 드러내는 유일한 미래의 비밀은 바로 저 ‘과잉’의 몸짓일 것이다.

6. 허무를 허물기 : 파국 시대의 정념에 대하여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파국일 것이다. 오늘날 글로벌화된 위기와 파국의 상황에 대한 담론들은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자본주의의 위기, 기후변동의 위기, 자원고갈의 위기가 그것이다. 자본주의, 기후변동, 자원고갈이라는 세 카테고리를 뜯어보면 자본주의가 나머지 둘의 주요한 원인임을 알 수 있다. 자본의 편재성 앞에서 존재가 느끼게 되는 지배적 정념은 허무이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이러니, 자유를 부르짖으면서도 모두가 어떤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형국. 파국 시대의 정념인 허무는 니힐리즘의 형식과 조응한다. 니힐리즘에 대해 니체는 세 가지 형태를 제시한다. 니힐리즘의 첫 번째이자 원형적 형태는 월등하게 높은 가치를 설정함으로써 그 높은 가치의 이름으로 삶을 부정하는 방식이다. 니체에 있어 부정적 니힐리즘은 원한을 가진 인간이 만드는 도덕으로 표상된다. 그들은 원한의 상태를 악에 의해 고통당하는 선인의 이미지로 변환한다. 행동하지 못하는 이 약자들은 도덕과 종교를 만들고 악이 무너질 그 심판의 날을 기다린다. 니힐리즘의 두 번째 형태는 수동적 니힐리즘이다. 어차피 세상은 더러운 것이니 그저 생존하는데 만족하면서 죽음을 기다린다. 그들은 존재와 세계에 대한 성찰 대신 오직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이는 니체가 보았던 최후의 인간들이다. 세 번째 니힐리즘의 형태는 이상과 가치를 위해서라면 자신과 세계전체를 파멸로 몰아넣는 급진적 니힐리즘이다. 수동적 니힐리스트가 냉소에 절어있다면, 급진적 니힐리스트는 분노에 지배당한다. 이러한 허무를 넘어서는 일은 초월적인 어떤 ‘실재의 윤리’를 찾아가는 것에서가 아니라 현존하는 지배적인 가치를 재배치하고 재평가하며 재가공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데 있다. 그것은 허무를 다시 허무는 작업이다. 모든 것이 완벽한 천상의 가치는 역설적으로 ‘몰락하는 것’으로서만, 혼돈으로 가득한 땅으로 떨어짐으로써만 가능하다. 니체의 초인이 하늘의 사람이 아니라 철저히 땅의 사람인 이유다. 땅이 있는 현실의 가치를 부단히 뒤집는 일은 허무를 극복하고, 가장 작은 데서부터 새로운 가치를 벼려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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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없는 땅, 유토피아 -문강형준의 “파국의 지형학”을 읽고

2018년 2월에 읽은 책들

2월도 다 지나갔습니다.
2018년은 유독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더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하니, 2018년의 지금 이 시간이 가장  빨리 흐르는 게 맞긴 하겠네요.

서설이 길었습니다. ^^

2월이 지났으니 2월 독서목록을 올려보도록 할게요.

 

문학작품

01. 몬테크리스토 백작 1, 알렉상드르 뒤마 저, 오증자 역, 민음사, 2002
02. 몬테크리스토 백작 2, 알렉상드르 뒤마 저, 오증자 역, 민음사, 2002
03. 몬테크리스토 백작 3, 알렉상드르 뒤마 저, 오증자 역, 민음사, 2002
04. 몬테크리스토 백작 4, 알렉상드르 뒤마 저, 오증자 역, 민음사, 2002
05. 몬테크리스토 백작 5, 알렉상드르 뒤마 저, 오증자 역, 민음사, 2002

한 권당 4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두께에 전체가 5권이라 읽을까 말까 고민을 좀 했지만, 역시 읽기를 잘 했어요.
누가 그랬죠.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들은 재미있어서 많이 읽히다 보니 고전이 된 거라고.
그 말에 딱 맞는 책이 바로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아닐까 싶네요.
과거에 잘못을 저지른 이들, 누구하나 피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파멸하는 장면을 읽다보면  아주 통쾌하죠.
그런데 말예요. 소설의 세계에서 떠나 현실을 생각해보면 좀 씁쓸한 마음이  들어요.
결국 복수는 아무나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복수는 복수하려는 자가 복수대상자들보다 더 부유하거나 권력이 있거나 능력이 뛰어나야만 가능하죠.
그렇지 않을 경우는 희생자는 복수고 뭐고 저절로 세상에서 잊혀지고 소멸되겠죠.
이건 뤼팽이나 프랑켄슈타인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점인데요, 뤼팽도 남들보다 뛰어난 변장술이 없었다면 괴도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도 인간보다 특출난 능력이 없었다면 자신의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에게 복수할 수 없었을 겁니다.
시원하면서도 찜찜한 이 기분. ㅜㅜ

06.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아르센 뤼팽 전집 1, 모리스 르블랑 저, 바른번역 역, 코너스톤, 2015

07.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저, 임종기 역, 문예출판사, 2008 (2독, 전에는 열린책들 번역으로 읽음)

* 프랑켄슈타인 리뷰는 며칠 전에 올렸었죠.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책입니다.

 

에세이

08.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저, 서해문집, 2016

은유님 글이 그냥 좋아서 자꾸 사서 읽게 되네요. “쓰기의 말들”도 샀지요. 엄청 기대 됩니다.

09.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정문정 저, 가나출판사, 2018

 

글쓰기

10. 소설가의 일, 김연수 저, 문학동네, 2014

소설을 쓰려면 이 공식을 반드시 기억해야 해요.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 + 그에게 없는 것)/ 세상의 갖은 방해 = 생고생(하는 이야기)

 

주인공은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은 죄로, 생겨서는 안 될 욕구가 생긴 인물입니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과정에서 그는 세상의 방해로 좌절하거나 혹은 그것을 극복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욕구가 충족이 되는 결론이더라도 그는 생고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생고생을 하지 않는다면 주인공이 아닙니다.
소설에서는 몰라도 실제 삶에서는 주인공 따위 되고 싶지 않군요.
그냥 평범하게 개고생 따위 모르고 살고 싶어요. ㅜㅜ
하지만 나중에 소설을 쓰게 된다면 나의 주인공은 험난한 골짜기를 엄청나게 굴러야만 하겠지요. 벌써 감정이입 되어서 슬퍼지네요.

11. 글쓰는 삶을 위한 일 년, 수전 티베르기앵 저, 김성훈 역, 책세상, 2016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책 이예요.
이 책 덕에 지난밤 꿈 이야기들을 눈 뜨자마자 적어 두곤 하는데, 나중에 이 이야기들이 훌륭한 글감으로 사용될 거 같아요.
(훌륭한 글이 될 거 같다고는 안했어요. 그건 아직 자신이 없어서….)

인문/사회

12. 프랑켄슈타인, 장정희 저, 살림, 2004

소설 프랑켄슈타인 해설서입니다. 소설 읽고 이 책 읽으면 금상첨화.

13. 북유럽 신화, 닐 게이먼 저, 박선령 역, 나무의철학, 2017

몇 년 전에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 3권을 읽었는데요, 그 때는 모든 게 낯설어 이름도 헷갈리고 지명도 헷갈리고 내용도 난해한 거 같더니, 두 번째로 북유럽 신화를 읽으니 이제서야 좀 이해도 가고 재미있네요.
세계의 끝 이야기는 아무래도 유럽에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닐까 의심이 돼요. 성경의 요한계시록이랑 비슷한 장면이 너무 많이 나오거든요.

14. 명견만리 : 새로운 사회, KBS 명견만리 제작진 저, 인플루엔셜, 2017

1권, 2권은 지난달에 읽고 이번에 세 번째 책을 읽었습니다.
새로운 사회라는 부제에 걸맞게 향후 근 미래의 모습이 어떻게 바뀌어 갈지를 예측하여 보여주고 있어요.
실제로 세상이 그렇게 바뀔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읽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리지도 않으니 교양으로 읽어두면 모임에서 대화를 나눌 때에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과학

15.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팀 르윈스 저, 김경숙 역, Mid, 2016

과학책이라기보다는 철학책에 가깝습니다.
즉, 읽기가 어려웠다는 얘기죠.^^ (철학책이 제일 어려워요. ㅜ ㅜ)
포퍼의 변증가능성 문제, 쿤의 패러다임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과학의 정치적 영향력, 진화론에서의 이타주의 문제, 자유의지의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데, 저자의 서술 방식이 명확한 의견 피력이 아니라서 주장하는 바가 뭔지가 명확하지 않더군요.
나는 과학적 지식에 아직은 문외한이라서, 이렇게 문제제기를 하는 책 보다는 정보를 주는 책을 먼저 읽었어야 했나 봅니다.

16. 과학잡지 에피 1호, 이음 편집부, 이음, 2017

과학비평을 표방한 잡지입니다.
이번호의 주제는 ‘가짜’인데요, 가짜는 거짓인가? 라는 질문을 가지고 여러 가지 분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특히 라이고 중력파 검출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웠는데요.
2010년에도 한번 중력파 검출기에 신호가 잡혔었답니다.
이 신호의 분석을 위해 엄청나게 많은 인력이 잠도 안자고 연구 분석에 매달렸는데,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이 신호가 눈가림 신호(가짜)였다고 합니다.
이는 라이고의 자료 분석 방법이 진짜 중력파를 관측할 수 있는지 시험한 것 이였고, 이러한 검증을 통해 2015년 발견된 신호가 진짜 중력파임을 입증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가짜 신호가 없었다면 진짜 신호인지 가짜 신호인지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없었다는 얘기죠.
가짜는 거짓인가? 물론 가짜가 진짜는 아니겠죠.
하지만 진짜의 조력자 역할을 할 수도 있다니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 기사 말고도 재미난 기사가 많았어요.
구입하기 편하게 이북으로도 출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음 출판사 대표님 부탁드려요!!)

이상으로 총 16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진다면 야외활동에 시간을 많이 쓰겠지만, 당분간은 맹추위가 이어질 듯하니 3월에도 집에 틀어박혀 부지런히 독서를 하지 않을까 싶네요.

3월… 현실은 아직 겨울이지만 마음은 벌써 봄이 온 듯 싱숭생숭.
조심해야지. 이러다 감기 들라. 모두 감기 조심하시고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와 21세기 호모데우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읽고

과학소설의 효시라 불리는 “프랑켄슈타인”.
올해 출간 200주년을 맞았다.
이 책은 고딕풍의 공포스럽고 기괴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인간과 유사한 괴물은 인간이 될 수 있는가, 과학자의 지적호기심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하는 등, 현재에도 여전히 그 의미가 살아있는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이 소설은 특이한 구조를 가진다. 화자가 3명인 이중 액자 구조로서, 다양한 관점으로 이야기를 전해준다. 화자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읽는 우리도 이 이야기를 다양하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

우선 이야기의 구조를 보면 A-B-C-B’-C’로 되어 있다.

A의 화자는 월턴 선장이다. 북극항로를 개척하려고 탐험을 떠난 그가 북극해에서 프랑켄슈타인을 구조한 이야기와, 프랑켄슈타인이 어떻게 최후를 맞이하였는지에 대해 적고 있는데, 이는 편지로 누이인 사빌 부인에게 전해진다.

B의 화자는 프랑켄슈타인이다. 그는 자신이 생명체를 만들어 낸 과정과 그 생명체가 자신 주변의 인물들을 살해한 것, 그래서 그 괴물을 찾아내어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를 자신을 구조한 월턴 선장에게 들려주고 있다.

C의 화자는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생명체이다. 그에게는 이름조차 없다. 그저 괴물이라고 불리는데, 그는 사회에 받아들여지고자 애쓰지만 결국 추한 외모로 인해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깨닫고 프랑켄슈타인에게 자신과 같은 여성 생명체를 만들어 내라고 강요한다.

우리 모두는 다 각자 자기 행위에 대한 변명을 갖는다. 아주 선하기만한 사람도 없고 아주 악하기만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괴물로 불리는 생명체가 자신을 창조한 자로부터 버림받고, 사회로 부터도 추방되어, 생명체에서 괴물로, 괴물에서 악마로 변해가는 과정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프랑켄슈타인조차도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만든 생명체에 대해 갖는 혐오감은 사실 그의 잘못만은 아니다. 그는 그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고, 그의 생명체는 창조자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존재여서 통제가 불가했다. 또한 그가 괴물의 배우자를 만들어 주지 못하는 이유도 그들의 존재가 인류에게 위험이 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포와 비극적 정서가 이 이야기 전반에 흐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아마도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만 상대를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비극의 시작은 바로 거기에 있다. 상대를 나의 입장으로만 바라보는 것.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이 서로 자신의 입장과 상대방의 입장을 나누고 합의하는 과정을 거쳤더라면 이러한 파국상황으로까지 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월턴 선장의 경우는 이와는 달리, 다시 남쪽으로 돌아가자는 선원들의 항의와 북극으로 가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 사이에서 타협을 하고 일단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나는 메리 셸리의 세련됨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야기가 갈등으로 치닫고 결국 파국에 이르고 말지만, 중심이야기의 바깥에서는 타인의 의견 경청과 자신의 욕구 보류라는 해결책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프랑켄슈타인은 2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다. 21세기 현재 더 중요하게 대두되는 문제인 듯하다. 21세기의 프랑켄슈타인은 아마도 호모 데우스, 즉 스스로 신이 되려는 인간일 것이며, 괴물의 존재는 인공지능이 될 것이다. 현재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처럼 인공지능을 발전시켜 현 인류를 뛰어넘는 존재를 만들고 싶은 지적, 기술적 욕구를 가지면서도 인공지능이 우리 인류를 멸망시키지는 않을까하는 공포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새로운 과학기술이 유토피아를 가져올지 디스토피아를 가져올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신기술개발은 너무나 거센 물결이라 아마도 그 방향을 돌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 이 소설이 어느 정도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가장 필요한 것은 각자의 입장과 욕구에 대한 공론화가 아닐까. 하나의 기업체나 기관이 신기술 개발을 하게 되면 그것을 공론화하고 시민사회와의 토론을 이어가야 한다. 합의되지 않은 기술은 일부의 낙관적 기대에도 불구하고 일부에게는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지나친 낙관론이나 공포에 치우지지 않고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정치적인 기술이다. 여기에서 정치적이라는 의미는, 우리는 하나의 사회, 국가, 인류라고 뭉뜽그려 이야기하지 않고, 사회, 국가, 인류가 서로 다른 개인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하나임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서로 다른 개인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의사소통과 합의의 과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 개인으로서는 과학기술에 대해 문외한이긴 하지만, 무작정 두려워하거나 혹은 기대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공부라도 하면서 걱정 또는 기대를 하련다.

감상문의 결론이 너무 교과서적이라 재미가 없긴 하지만, 어쩌랴, 의사소통과 합의가 현재까지 민주사회에서 가장 합리적 방법이라고 합의된 것이고, 또한 아는 게 힘인 것을.

암튼 200년 전 탄생한 괴물이야기에서 새로운 과학기술의 미래까지 생각하게 되다니, 이 책이 한번은 읽어봄직한 문제작임은 확실하다.

참을 수 없는 경어의 복잡함

초판 출간 2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켄슈타인을 다시 읽었다.
몇 년전에 1831년 판을 번역한 열린책들 버전을 읽었으므로, 이번에는 1818년 초판본을 옮겼다는 문예출판사 버전을 읽었다.

그런데, 이게 처음부터 완전히 다른 책을 읽는 느낌이었다.
열린책들은 월턴이 손위 누나인 사빌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하는데, 문예출판사는 그 사빌부인이 누나가 아니라 여동생이기 때문이었다.

누님에게는 엄청나게 공손한 존대말로 상황보고를 하는데, 누이 동생에게는 친절한 평상어를 쓰고 있었다.
영어의 sister 만으로는 누나인지 여동생인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역자가 임의로 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월턴이 프랑켄슈타인을 깨진 빙하에서 구조한 후, 둘이 대화를 할 때 보면 열린책들은
월턴은 경어를, 프랑켄슈타인은 하오체를 쓰고, 문예출판사는 하게체를 쓰고 있다. 하게체를 쓰기에는 월턴과 프랑켄슈타인의 나이차가 얼마 안나는 것 같아서 좀 뜨아~ 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번역에 따라 경어의 수준을 다르게 적용하였는데, 그 뉘앙스가 너무 다르다.
같은 이야기 다른 느낌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나이, 계층, 성별에 따라 써야하는 경어가 다 다르기 때문에 초면부터 호구조사에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이름을 막 부르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 호칭을 붙이려면 나이랑 하는 일 등등을 아는 것이 필수렸다.
언니인지 동생인지 아무개씨라고 부를지, 아무개님이라고 부를지….선생님이라고 부를지… 어떻게라도 상대를 부르려면 뭐라도 붙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기요~ ‘라는 이상한 말로 부르는 수 밖에.

거의 눈치 게임 수준이다.

일상에서도 이럴진데, 외국문학을 번역할 때 등장인물의 나이, 계층 등의 정보가 부족할 경우, 번역가가 경어를 쓸지 평어를 쓸지 꽤 고민을 해야만 할 거란 생각이 든다.

암튼 책의 내용이 중허지, 존대말인지 반말인지가 중헌건 아니니까.
느낌적 느낌들은 접어두고 내용에 집중하여 일단 책을 다 읽었다.

원래는 독서 감상문을 쓰려고 했으나, 현재 몸이 많이 피곤하여 생각을 깊게 하기도 어렵고, 처음 책을 열었을 때 존대말 반말의 뉘앙스 차이가 너무 크게 느껴져 일단 워밍업으로 경어의 복잡함에 대해 썼다.

프랑켄슈타인 독서감상문은 머리 맑을 때 재시도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