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산책로

저는 출퇴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라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냅니다.
그렇다고 별도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라 운동량이 어마 어마하게 적죠.
그래서 결심한 바가 산책입니다.
주 5회 이상은 한 시간 이상 산책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특별한 산책로를 다니는 건 아니고, 동네 주택가 골목을 이 골목 저 골목 다닙니다.

오늘 낮에 “발상”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어요. 거기에 보면 영감의 원천의 하나로서 걷기와 산책을 추천하고 있더군요.
니체와 한트케, 구스타르 말러, 칸트 그 외 수많은 예술가와 사상가 들이 걷기를 통해 영감을 얻은 예들이 나옵니다.

“움직이면서 생각하기. 이것은 수많은 예술가와 사상가를 통해 확인된 아주 오래된 방법이다.
(중략)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매일 점심식사 후에 항상 산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수첩과 지휘봉을 들고 아내와 함께 산책을 했다.”

읽다가 이 부분에 꽂혔는데요, 그 이유는 너무 단순합니다.
제가 즐겨가는 산책 코스 중에 길 이름이 쿠스타프 말러 플라츠 라는 곳이 있거든요.^^

주택가 골목길을 굽이굽이 걷다가 보면 갑자기 넓게 화악~ 펼쳐지는 초록의 전경.
집에서 좀 많이 걸어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갑작스럽게 초록 세상에 입장하는 순간이 일종의 마법같아서 그 재미에 종종 갑니다.

이곳이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인 말러와 특별히 연관된 장소는 아닐 거 같아요.
거리 이름이나 광장이름에 유명인사의 이름을 워낙 많이 갖다가 붙이니까, 여기도 그냥 유명 작곡가의 이름을 붙인거겠죠.
그래도 반갑네요.

이 곳을 산책할 때 마다 말러가 산책을 하면서 곡의 영감을 받은 것처럼, 나도 무언가 영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생기고요.^^

태고적 기억, 블루 스카이

하늘이 파랬습니다. 구름도 없이.
산책길에 올려다 본 하늘의 색이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어 보았어요.
파랗긴 하지만 그렇게 강렬하게 파랗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은은한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파란색은 보통 차가운 색으로 분류되지만, 이런 하늘은 차갑다기 보다는 오히려 따뜻한 느낌을 주네요.
왠지 머나 먼 옛 기억을 소환하는 기분이랄까요.
아마도 우리의 먼먼 조상이 아프리카의 사바나 초원에서 살 때 늘 바라보던 것이 넓게 펼쳐진 초원의 초록색과 하늘의 파란색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태고적 원형을 바라볼 때 얻는 안정감이랄까.
우리가 초원의 초록과 하늘의 파랑에 정서적 반응을 보이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파랗기만 한 하늘을 보니, 온통 파란색인 이브 클라인의 작품, IKB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을 봤을 때 느꼈던 충격이 떠오릅니다.
그 작품을 봤을 때 느낀 강렬한 정서에 대비해서 오늘의 하늘은 평온한 정서를 불러 일으킵니다.
다른 날은 또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오늘만큼은 클라인 블루보다 오늘 바라본 스카이 블루가 훨씬 더 좋네요.

(* 이 글은 4월 29일에 쓴 글입니다. )

경험하고도 경험하지 못하는

“아까 머리 부딪친 데는 괜찮아?”
남편이 묻는다.
“머리? 무슨 머리? 내가 언제 머리를 부딪쳤어?”
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얼굴로 남편을 본다.
“엄마, 아까 교회에서 발밑에 물건 놓다가 앞 의자에 머리 부딪쳤잖아. 엄청 크게 쿵 소리가 나서 아빠랑 나랑 쳐다보고 웃었는데…”
옆에 있던 아들까지 합세를 한다.
갑자기 화가 나려고 한다. 아니 이 사람들이!!! 내가, 당사자인 내가 머리를 부딪친 적이 없다는 데 왜 자기네 들이 난리야.
“야, 머리를 부딪쳤으면 머리가 아팠어야지. 나는 머리가 하나도 안 아팠거든! 그리고 내가 아니라는데 왜들 그래?” 내가 높고 화난 소리로 외쳤다.
“아… 엄마 정말….” 기가 차다는 듯한 아들의 표정에 잠깐 기억을 더듬어 본다.

물건을 바닥에 내려놓느라고 머리를 숙인 기억은 난다. 하지만 머리를 부딪친 기억은 없는데….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그 장소에서 쿵 소리가 날 상황은 고개 숙였던 사람이 머리를 들다 가 부딪치는 상황 밖에 없다.

하긴…. 몸이 퍼렇게 멍이 들어 있어도 언제 어디서 생긴 멍인지도 모르고…
손이 따끔거려서 들여다보면 살이 베여있기도 하니까. 물론 언제 베였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고.

옛날부터 감각이 둔한 편이었다.
아주 옛날 일이긴 한데, 한번은 친구가 날 놀리겠다고 책상에 앉아 열심히 필기 중엔 내 머리를 뒤에서 책으로 쳤단다. 친구는 내가 언제 고개를 돌려 화를 내나 한참 기다리고 있었단다. 그리고 아주 한참 지난 뒤에 내가 물었단다. 너 왜 내 뒤에 그렇게 서 있어? 가서 앉지 않고.

감각이 둔한 건 이번 경우처럼 좋게 기능할 때가 있다. 머리를 공개적으로 부딪치고도 남들이 봤을까 부끄러워할 일이 없으니까.
하지만 걱정이 들 때도 있다. 만약에 내가 범죄현장의 유일한 목격자가 된다면, 보아도 못 본 것 투성이여서 진술을 제대로 할 수 없을텐데….
나는 남들이 안경을 썼는지 안 썼는지도 많은 경우에 기억을 못한다. 아주 오래 알고 지냈다거나 안경이 아주 특이하다면 기억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요즘은 일부러 저 분은 안경을 썼다. 안 썼다. 마음 속에 저장하려고 노력할 정도.

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는 사람이 바로 나인가.
경험하고도 경험하지 못하는.
그래도 어쩌랴.
생긴 대로 살아야지. 범죄현장의 유일한 목격자가 될 일이 없길 바라면서…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6031

어제 집에서 혼자 영화를 봤다.
영화를 딱히 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글은 써야겠고 글 소재는 없고 해서 영화를 봤다.
주객전도도 이런 주객전도가 없다.
하지만 한밤중에 혼자서 영화 보니까 너무 좋더라.

어제 밤 급하게 고른 영화는 짐 자무쉬 감독의 2013년 영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였다. (이 후 글에 스포일러 많습니다.)
틸다 스윈튼과 톰 히들스턴이라는 매력적인 배우들이 나오는 게 선택의 주요요인 이었다.
중년의 사람들이 이렇게 매혹적이어도 되는지.
중년의 사람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는 게 가능한 지.

문학과 음악을 사랑하는 예술가 커플인 뱀파이어의 이야기로, 어쩌면 내용은 없고, 탐미적인 이미지만 남는 영화라는 평을 얻을지도 모르겠다.
예술가이면서도 예술에 대한 고뇌도 없고, 인간과 삶에 대한 싫증도 결국 간간히 드러나는 고질병의 하나로만 치부되며,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열되지만 그저 이름만 나열될 뿐, 그들 삶에 끼친 영향은 전무하다.
영화에서 삶의 교훈을 기대하는 건, 무리한 요구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스타일에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21세기 뱀파이어들은 더 이상 사람 목을 물지 않는다. (물론 예외는 있다.)
그러니까 피도 우아하게 와인 마시듯 음미하며 마신다. 우아하게.
뱀파이어 부부는 잠도 우아하게 잔다. 마치 두 몸이 행위예술가가 설정해 놓은 듯이 포개져서 우아하게.
늘 끼고 다니는 장갑과 선글래스는 패션 아이템이 된다.(같이 클럽에 간 인간이 자기도 선글래스를 따라서 낀다. 왜?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게 멋져 보이니까. 그가 좀 더 오래 살았었다면 장갑도 꼈을 것이다.)

영화는 아름다움만을 위해 진행되는 듯 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반전을 준다.
21세기 스타일로 우아하고 아름답게 살던 뱀파이어 부부에게 엄청난 위기가 다가온다.
바로 순수한 피의 공급책이자, 그들의 인생 선배인 뱀파이어가 세상을 뜬 것이다.
이 위기는 너무나 직접적인 문제다. 바로 생존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피를 공급 받을 수 없다는 것. 결국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
그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삶의 종말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하지만 그들 앞에 나타난 젊고 아름다운 연인들. 사랑을 나누느라 주변에는 관심도 없다.
죽음을 기다리던 뱀파이어 부부의 마지막 결심.
21세기지만 15세기에나 하던 짓. 즉, 인간 사냥을 다시 하자고.
그리고 그 연인들에게 다가가며 영화는 끝난다.

예술과 문학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그들이지만, 생존의 위기에서는 동물적인 본능이 앞설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사람도 동물이기에 어쩔 수 없다. 뱀파이어가 있다면 당연히 그들도 그럴 것이다.
삶에 대한 의지. 생존 욕구.

영화의 마지막을 보니 제목이 이해가 간다.
제목에 나오는 ‘오직 사랑하는 이들’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자기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 즉 살고자 하는 사람들만 살아남는다는 뜻이란 것을.
그래서 나는 이 영화에 후한 점수를 줄 것이다.
생존 문제가 없을 때는 우아하게 살고, 생존 문제가 걸렸을 땐 동물처럼이라도 어떻게든 살자.
나도 그럴 것이다. 어떻게든 살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난 주말에 베를린 근교 루피너 호수(Ruppiner See)에 다녀왔다.
그냥 놀러간 것은 아니고 다른 일로 갔는데, 거기에 그 호수가 있었다.
오랜만에 넓은 물을 보니, 겨우 내 춥고 답답했던 마음 속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인데 반해, 중부유럽에 속한 독일은 북쪽만 바다에 면해있다.
바다 보러 가는 일은 연중 혹은 격년 중 큰 행사로 치러진다.

하지만, 군데 군데 큰 호수가 많기 때문에 아쉬운 대로 바다 대신 호수를 만나러 가곤 한다.
일정 기간 동안 호수나 바다를 보지 못하면 금단 현상이 나타나는 것 같다.
전생에 물고기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바다… 호수…를 그리워하고 있다 .

바다나 호수에 갈 때마다 <논어>에서 공자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동적이고 어진 사람은 정적이며,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되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

(子曰 知者樂水하고 仁者樂山이니 知者動하고 仁者靜하며 知者樂하고 仁者壽니라.
자왈 지자요수하고 인자요산이니 지자동하고 인자정하며 지자락하고 인자수니라.)

지자요수. 인자요산.

아마도 나는 어진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산에 올라가기에는 체력이 너무 허접하다.
그럼 지혜로운 사람인가? 현재 나는 지혜로운 사람도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인자 보다는 지자가 더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물을 이렇게도 그리워하니.

흐르는 물을 세상의 지혜로 표현하신 공자님의 표현력이 대단하시다.
지혜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변화와 분리될 수 없고,
새 시대에 맞는 사고의 유연함이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
늘 그 자리에 있는 산을 한결같은 사람이 갖는 어짊의 품성으로 비유하신 것도 그렇고.

그나저나 공자님 말씀을 따르면,
장수하려면 어진 사람이 되어야하고, 즐겁게 살려면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하는데…,
나는 오래 오래 살고도 싶고, 재밌게 살고도 싶은데…
내가 어짊과 지혜로움을 다 갖춘 사람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