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만성인가? 만기대성인가?

대기만성인가? 만기대성인가?

물론 대기만성(大器晩成)이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요즘 들어 만기대성도 맞는 말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주 아주 오래전 일이예요.

한국에 살 때니까 최소 20년도 넘은 기억이죠.

좀 있어 보이는 걸 좋아하는 저는 예전에도 속담이나 사자성어를 섞어가며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지요.

그때도 어떤 이야기 끝에 ‘대기만성’이라는 말을 제가 썼습니다.

그랬더니 대화하시던 분이 ‘만기대성’이라고 하시더군요.

예나 지금이나 따짐쟁이였던 저는 만기대성이 말이 되느냐.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지지만, 늦게 만들어진다고 다 큰 그릇이 되는 건 아니지 않느냐 하면서 따졌더랬죠.

 

그런데 희한하게 그 이후 만기대성이란 말이 머리에 계속 남는 거예요. .

나이를 먹어가면서 주변을 보니 재능이나 머리보다는 성실과 끈기가 결국 훌륭한 사람을 만드는 걸 많이 보게 되었거든요.

즉, 성실함으로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이 이기는 거죠.

엎어치나 메치나 그 말이 그 말 아니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게 미묘하게 다른 게, 대기만성은 이미 ‘대기’를 목표로 그걸 이뤄나가는 느낌이라면, 만기대성은 욕심 없이 꾸준히 하다 보니 어느 한 분야의 대가가 되어있는 느낌이랄까?

예전 중학교 교과서 읽었던 호손의 소설 “큰 바위 얼굴”에 나오는 어니스트같은 사람이 한 예가 되겠네요.

큰 바위 얼굴의 인물이 되려던 게 아니었는데 열심히 살다보니 큰 바위 얼굴 속 인물이 되었다는 이야기.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큰 그릇”이 되려는 욕심보다는, 꾸준히 하다 보니 어느 샌가 “크게 이룬” 사람이 되기를.

나는 왜 쓰려는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조지 오웰은 글쓰기의 동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네 가지 동기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순전한 이기심.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를 말한다.

2. 미학적 열정.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3. 역사적 충동.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전해 두려는 욕구를 말한다.

4. 정치적 목적.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

조지 오웰은 본인이 천성적으로 앞의 세 가지 동기가 네 번째 동기를 능가하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살았던 삶의 배경 때문에 정치적 글을 쓸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전체주의에 맞서고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글들을 썼죠. 그러나 그는 그저 정치적인 글 말고,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들고 싶었다고 합니다.

 

몇 년 전부터 심하게 글쓰기 충동이 일었을 때, 물론 저에게도 이기적인 동기가 가장 컸습니다. 이름 석자를 알리고 싶은 욕구였죠. 아마도 그 다음 동기는 정치적 목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정확히 말해서 사회적 목적이라고 하는 게 좋겠죠.

그 동안 제가 여기저기 올린 독서목록을 자세히 보신 분들은 알 수도 있겠지만 최근 몇 년 저의 최대 관심사는 여성주의였습니다. (그 다음은 종교입니다.)

글을 쓴다면 여성주의에 대한 글을 쓰고, 읽은 이들이 여성주의의 중요성을 함께 인식하기를 바랬죠. 하지만 아직 이론적 내공도 일천하고, 현 상태에 대한 확실한 분석도 없는 상태에서 아무것도 아닌 여성이 뭔가를 쓴다는 것에 두려움이 많았어요. 자체 검열이 심했죠.

지금도 그렇습니다.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인터뷰집에서 읽은, 움베르크 에코의 말이 떠오르네요.

“우리가 이론화할 수 없는 것은 이야기해야한다.”

.나는 전문적으로 그 분야를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아직 아무것도 이론화할 수 없는 상태고, 결국 내가 이것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에 대한 의문이 항상 듭니다.

그 때마다 이 문구를 떠올립니다. 이론화 할 수 없다면 이야기로 전해야지.

이론화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로 쓴 예가 바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고 “1984”가 아닐까요?

지금 조지 오웰의 산문집인 “나는 왜 쓰는가”를 읽고 있는데, 이 글들 역시 예술적인 정치글들 입니다.

그를 따라 오늘 글의 제목을 “나는 왜 쓰려는가”로 달아보았습니다. 아직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하기엔 너무 민망한 단계라, 쓰는가가 아니라 쓰려는가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나는 왜 쓰려는가?

일단 이름 석자를 알리고픈, 뭔가 있어보이고 싶은 마음을 감출 생각은 없습니다. 다음은 예술적 글쓰기를 할 역량이 되면 사회적 글쓰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론화할 여력이 없다면, 아마도 이야기를 쓰게 되겠지요.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을 때 까지는 안타깝지만, 계속 자체 검열을 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읽히려면 우선적으로 아름다운 글이어야 하니까요.

이제 1학년 입학했다 생각하고 열심히 하렵니다.

사랑 대신 삶을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을 읽고 (Feat. 우엘벡 “소립자”)

 

사랑은 일종의 게임이다. 게임의 규칙은 이렇다. A는 B와 C를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동시에 사랑할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반칙으로 여겨진다). 반면 B와 C는 동시에 A를 사랑할 수 있다. 이러한 불균형 때문에 사랑의 승자와 패자가 가려진다. 게임은 영원히 계속되고, 승자와 패자는 계속 바뀐다.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은 이런 사랑게임에 관한 이야기이다.

장례식에 두 여자가 있다. 결국 한 여자만 미망인의 칭호를 얻는다.

전쟁 후 돌아온 남편에게 옆집 여자가 친절하게 굴자, 남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엄마의 행동이 변한다. (남자의 수가 적으니 여자가 약자가 된다)

유명해진 극작가는 배우를 버리고 무용수를 선택한다.

한 여자는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기미에 순순히 게임을 포기하고 그를 보내준다. 등등.

우리의 주인공 ‘나’는 중년의 여성이다. 어느 날 급작스런 마비와 발작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회복되고, 그 사건으로 사랑을 삶의 절대 가치로 삼는다. 그 후 ‘나’는 프란츠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나’는 이미 남편과 딸과 8마리의 거북이들을 떠나보냈는데, 그는 반칙을 하면서 그녀와 자기 부인 사이를 오가기 때문에 ‘나는 그의 부인과 게임을 해야만 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외친다. “그대를 차지하거나 죽는 것”이라고(어느 희곡의 대사이다). 사랑의 승자가 되거나 아니면 죽어버릴 것이라고. 프란츠가 부인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떠나자 ‘나’의 망상과 집착은 극에 달한다. 어느 날 프란츠는 ‘나’를 떠난다(아니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그를 차지하지 못하였지만 ‘나’의 외침대로 죽지는 않는다. 떠나간 사랑의 허상을 만들어 놓고(프란츠라는 이름도 사실은 그녀가 새로 붙인 이름이다. 실제 그의 이름은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와 함께한 기억으로 40년인지 50년이지 모를 긴긴 삶을 산다. 결국 ‘나’에게 삶의 의미는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삶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죽음 대신 기나긴 삶을 유지하기 위해 사랑의 허상까지 만든 것을 보면. ‘사랑 아니면 죽음’이라는 외침은 단지 게임의 승리를 기원하는 구호일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나는 우엘벡의 소설 “소립자”가 떠오른다.

자신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우선시 하는 어머니 덕에 두 아들 부뤼노와 미셀은 버림받고 사랑으로부터 배제된다. 어머니가 사랑을 찾았기 때문에 자식들은 사랑을 잃었다.

브뤼노는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랑은 젊고 매력적인 사람들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그는 늘 변두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반면 미셀은 사랑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 학문에만 매진한다. 그는 모두 사랑을 찾지만 사랑 때문에 공격적이 되고 슬픔을 가질 수 밖에 없는 현 인류의 상황에 절망하여, 현 인류의 멸종과 신인류의 창조를 제안하고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의 제안이 세상에 받아들여지고 신인류가 만들어진다. 무성생식으로 자가복제를 하여 이기주의와 잔혹함과 분노에서 벗어난 인류 말이다. 그리고 현 인류는 서서히 멸종의 길을 간다.

평단에서는 우엘벡을 ‘성적인 프롤레타리아들의 예언자’라고 한단다(동감한다). 돈을 많이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로 계급이 나뉘듯, 사랑을 많이 받는 자와 받지 못하는 자 사이에도 사회적 계급이 생긴다 . 이렇듯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갈 수 없는 것을 가장 큰 삶의 가치로 여기고, 여기서도 사랑 저기서도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외치는 것이 정당한 것일까?

사랑을 잃은 자들이여,

사랑 때문에 분노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그렇다고 죽지도 말고

그저 나의 살던 삶을 살자.

사랑은 그렇게 고귀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P.S) 오늘 쓴 글은 아니고, 전에 써 둔 글이예요.

주간 목표인 나흘 업데이트 이미 달성한 기념 및 주말 맞이 기념으로, 전에 써 놓고 컴퓨터에 모셔놨던 거 올려봅니다. ^^

좋은 주말들 되세요!!!

셰에라자드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글쓰기 시작 나흘 만에 글감이 고갈되었어요.
글쓰기 연습할 때 제일 어려운 문제가 글감이라더니 정말 그러하네요.
일상에서 글감을 찾는다고 하면, 뭐가 있을라나.
오늘 한 일을 떠올려 봅니다.
언니와 전화로 여행계획 세우기.
“아르센 뤼팽” 한 챕터 읽기.
독일어 책 5 페이지 읽기.
비 맞으며 산책하기.
밤에 드라마 시청.
그 외 각종 잡다한 집안 일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노트북 앞에 앉았죠.
별 게 없지만 한 번 쥐어짜 봅시다. 뭐든 나오겠죠.

새로운 게 없으니 오늘도 결국 책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어렸을 때 다들 읽었다는 “셜록 홈즈”와 “아르센 뤼팽”을 저는 그 당시 읽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독서를 좋아하는 낭만 소녀는 아니었거든요. 순정 만화만 읽던 순정 소녀였죠. ^^

그러다가 몇 년 전에 홈즈 시리즈 중 “바스커빌가의 개”를 읽고만 거예요.
이렇게 재밌는 세상이 있었다니!
완전 감동 먹고, 홈즈 시리즈 전권 구입 감행!!!
9권을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아르센 뤼팽”도 시리즈로 구입했어요.
홈즈를 읽었다면 루팽도 읽는 게 예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
그런데 이게 생각만큼 확∼ 끌리지가 않네요. 밤새워 읽어도 모자랄 판에 한 챕터 읽고 며칠 있다가 한 챕터 읽고 하는 중이거든요.

이 이유가 뭘까 고민을 좀 해봤습니다.
일단 홈즈는 탐정이고 뤼팽은 괴도라서? 내가 그렇게 도덕적 인간 이었던가?
아니면, 영국 신사 대 프랑스 신사인데, 프랑스식 낭만보다 영국식 매너를 더 좋아해서?
범인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추리를 하는 것과, 범인이 누구인지 아는 상태에서 어떻게 범행을 일으키는가에 대한 문제? 즉, 누구냐? 와 어떻게? 의 차이?

아직은 모르겠어요. 뤼팽은 이제 겨우 제 1권의 반쯤 읽은 정도니까요.
일단 1권부터 부지런히 읽어 마무리 한 후 분석해 보도록 해보지요.
분석결과는 기대하지 마세요. 아무래도 아무 이유 없는 취향 문제라고 결론이 나겠지요. ㅎㅎ

이렇게 급조한 글로 네 번째 밤도 마무리를 짓습니다.

갑자기 천일야화가 떠오르네요.
제가 쓰는 이런 식으로 술탄 앞에서 셰에라자드가 이야기를 했었다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겠죠?
제가 셰에라자드가 아니라 내 맘대로 쓸 수 있어서 천만다행입니다.^^
좋은 밤 되시고요∼

숫자맹이 되지 않기

숫자맹 혹은 계산맹이 뭔지 아시나요?
숫자를 보면 정신이 멍∼ 해지고, 계산하려고 하면 머리가 막 아파지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 아닐까요?
인터넷에서도 그 정의가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 걸로 보아서 널리 쓰이는 말은 아닌 거 같습니다.
암튼 각설하고 저도 숫자맹 중 하나이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식당 계산서만 봐서 머리가 어지러우니…ㅠ.ㅠ
지금이야 핸드폰에서 연락처를 눌러 전화를 걸면 되지만, 옛날에는 수첩에 적어놓은 전화번호를 보면서 전화를 걸었는데, 종종 번호를 잘 못 눌러 엉뚱한 사람이 받았던 기억이. 흑ㅠ.ㅠ

숫자맹 이야기를 왜 하느냐하면, 오늘 낮에 “생각한다면 과학자처럼”이라는 책을 읽다가 수에서는 맥락이 아주 중요하다는 부분을 읽게 되었거든요.

거기에서 수를 잘 못 쓴 것에 대한 예시로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와요.

“심해 바닷물과 해수면 바닷물 간의 이상적인 온도차는 적어도 섭씨 20도, 즉 화씨 68도가 되어야 한다.”

이 예시에서 저자는 섭씨 20도가 화씨 68도는 맞지만, 섭씨 20도의 온도차가 화씨 68도의 온도차와는 같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실제 온도차는 화씨로 36도라고 하네요.
여러분들은 이해가 되시나요? 온도와 온도차는 전혀 다른 내용이라는 거죠.
처음에 읽고 나서는 이 말을 이해하는 데에 얼마나 오래 걸렸던지요. ㅠㅠ

그 외에도 저자는 호들갑스러운 언론을 비판하는데요.
예를 들면 ‘식인상어’ 뉴스라던가, ‘산불뉴스’ 등이죠.
어느 해는 식인상어 위협으로 몇 주간 언론의 헤드라인이 채워졌지만, 실제 그 해 상어에 물려 죽은 사람은 두 명이었고, 또 2002년에는 “산불이 콜로라도를 휩쓸다” 등의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 실렸지만, 실제로 불탄 지역은 콜로라도 주의 0.29퍼센트였다고 하네요.

만약 제가, “이 블로그에 방문자 수가 하루만에 2배가 늘었습니다!”하고 공지에 올리고 홍보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제 방문자는 1명이었는데, 오늘 2명이 온 거라면 방문자 수가 2배가 된 건 맞지만, 허허… 그게 자랑할 건지는 모르겠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는 이러한 맥락 없는 수 인용이 많이 된다는 사실!

언론에서 말하는 숫자는 항상 그 단위를 확인해야 합니다. 센티메터로 표기하냐 메터로 표기하냐에 따라 다르고, 헥타르를 쓸거냐 에이커를 쓸거냐에 따라서도 다르고, 평으로 계산할거냐 제곱미터로 계산할거냐에 따라서도 숫자가 확연히 달라지니까요.
또한 그 수가 크다, 작다, 늘었다, 줄었다, 어마어마하다, 미미하다 등의 형용사를 사용할 때, 과연 그 단어가 어느 것과 비교하는 것인지, 즉, 전년도 대비인지, 다른 항목 대비인지, 기대치에 대비한 것인지 등등을 반드시 꼭꼭 확인해 봐야 할 거 같아요.

그 동안은 숫자가 나오면 그냥 숫자는 건너뛰고 읽는 경향이 있었지만, 숫자맹이 되지 않으려면 꼼꼼히 따지는 버릇을 길러야겠네요.

지금도 가뜩이나 따짐쟁이로 여겨지는데, 더 따짐쟁이가 되야 하나.
뭐 그렇게 듣고 싶어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성격 좋다는 얘기 듣기는 아무래도 글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