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당신의 이름을 알아!

지금부터 적는 이야기는 실제 벌어진 일이 아니다.
내가 잠을 자는 동안 내 머리 속에서 생생하게 일어났던 일이다.
말하자면 모든 게 뒤죽박죽인 개꿈이지만 꿈이 너무 선명하여 메모를 해 두었다가 여기에 적는다.
글쓰기 책에 나오는 조언들 중 꿈일기를 써보라는 조언이 있어서 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과감하게 올리니 양해해 주시길.

사건의 발생 장소는 폴란드.(도시는 모르겠다.)
나는 해변가에 방갈로를 대여하여 묵고 있었다.
이 해변은 실제 해변이 아니라 인공모래와 인공바닷물로 만든 인공해변이었다.
겨울이었지만 실내온도도 그렇고 실내조명도 어쩜 그렇게 딱 맞게 조절하여 여름밤 해변의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여름밤엔 맥주 한잔이 제격이지. 하고 생각하며 방갈로 끝에 있는 야외주점에 갔다.
무슨 맥주를 마실까.
주문하는 곳 뒤에 크게 붙어있는 메뉴를 훑어보았다.
어… 폴란드 맥주. 그거. 이름이 뭐더라. 나 그게 마시고 싶은데…
갑자기 왁자지껄 한국말이 들린다.
열댓명 정도의 한국의 중년여성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 분들 덕에 나는 메뉴도 제대로 못 읽고, 주문하는 곳 옆의 구석으로 밀려났다.
어차피 맥주 이름이 기억이 안나니, 그 분들이 먼저 주문해도 상관없었다.
단체관광 손님들인가 보다 생각했는데, 가이드도 안보이고, 모두들 폴란드 말로 능숙하게 주문을 하는 것이었다.
와… 대단하다. 외국어 저리 잘하시다니 부럽다. 하며 그 분들이 주문을 하고 음료를 받아가는 모습을 넋 놓고 보았다.
그 때 갑자기 맥주 이름이 생각났다. (꿈에서는 생각났었는데, 지금은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이 안남. 여기서는 그냥 유명 폴란드 맥주인 지비에츠라고 하자.)
그래서 얼른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열 댓명 주문인데 셀프 서비스라 시간이 좀 걸렸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지비에츠 맥주 두 잔! 하고 주문을 했다. ( 왜 두 잔을 시켰는지는 모르겠다. 암튼 두 잔. 그런데 나는 어느 나라말로 주문을 했을까. 그것도 모르겠다.)
그리고 뒷 손님들이 주문할 수 있도록 약간 옆으로 비켜 서서 내 음료가 나오길 기다렸다.
뒤에 손님은 중국인 남자 관광객 두 명이었는데, 그들도 나처럼 폴란드 맥주 두 잔을 시켰다.
음료가 나왔다. 맥주 두 잔! 그런데 맥주를 가지고 온 직원이 이 맥주를 내가 아닌 중국인들에게 주는 것이 아닌가.
제가 먼저 주문을 했는데요. 하고 따지니, 맥주를 전해준 직원이 말하길 주문받은 직원이 내 주문을 잊어버린 것 같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아까 내 주문을 받았던 직원이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며 웃었다. 아니 비웃었다.
그 직원은 미안하다며 새로 가져오겠다며 사라졌다가 잠시 후 다시 나타났다.
다행히 양 손에 맥주가 한잔씩 들려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내 앞에 잔을 내려 놓았다. 분명히 내 앞에다가 잔을 내려 놓았는데, 맥주가 사라졌다. 깜쪽같이. 눈도 깜짝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그 사라진 맥주가 주문대 바로 앞 테이블에 놓여있는게 아닌가?
그 자리에 앉아있던 손님들은 마치 그 맥주가 원래부터 자기들이 주문해서 받아온 맥주인냥 건배를 하고 신나게 마시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가슴이 쿵쿵 거리고 얼굴에 열이 올라 벌겋게 되었다.
그 직원은 또 나를 보고 웃었다. 아니 비웃었다.
당신 이름은 뭐죠? 그리고 매니저 좀 불러주십시오. 라고 했다.
직원은 놀라는 척 연기를 하면서, 들고 있던 쟁반으로 유니폼에 붙어있던 이름표를 가렸다.
매니저님은 지금 안 계신데요.
당신 이름이 뭐냐고 물었는데요?
대답은 하지 않고 또 실실 웃기만했다.
좋아요. 덤불 머리를 하신 당신. 인상착의를 아니까 이 곳 인터넷 게시판에 불만 접수하겠습니다. 라고 가급적 화를 가라앉히고 내가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직원의 덤불 같은 머리가 대머리로 바뀌고, 없던 수염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다 뭐야.
너무 억울해서 말도 안 나오고 눈물까지 저절로 흘러나왔다.
나는 뒤돌아서 그 가게를 나왔다.
용서하지 않겠어. 하며 분노로 팔을 휘적대며 걷는데, 글쎄 그 인간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 뒤를 따라오는 것 아닌가.
아무래도 혼자는 위험해. 빨리 숙소에 가서 구원병을 데려와야겠어.
나는 점점 더 빨리 걷다가 뛰다가 했다.
그런데 갑자기 대머리에 덥수룩한 수염으로 변신한 그 인간이 내 앞에 슥~ 나타나는 게 아닌가.
너무 놀라 엄마야~ 를 외치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그 때 갑자기 그 작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아마도 주문하면서 슬쩍 본 이름을 내 무의식이 기억하고 있다가 놀란 순간 의식으로 밀어 낸 모양이었다.
이거 봐! 난 당신의 이름을 알아! 나는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나를 보며 비웃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 침이 튀길 정도로, 성대가 다 갈라질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당신의 이름은 파울 비랙이야. ( 이 뜬금없는 이름은 뭘까? 이 이름의 의미를 전혀 모르겠다. 어쨌건 꿈에서 내가 외친 이름이고 잊어버릴까봐 눈뜨자마자 바로 적어두었다.)
웃고 있던 상대의 얼굴이 점차 무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영화에서 어떤 악한 존재가 주인공의 일격에 사라져 버리듯이 그렇게 흔적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주인공인 나는 그 길로 꿈에서 깨어났다.

모든 일이 꿈이라서 다행이었다.

실제로 그런 일을 당했다면 얼마나 억울할 뻔 했겠는가.

그렇지만, 꿈이긴 했지만, 끝까지 폴란드 맥주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건 좀 아쉽긴 했다.

혹시나 폴란드 맥주를 보게 된다면 꼭 마셔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