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프로메테우스와 21세기 호모데우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읽고

과학소설의 효시라 불리는 “프랑켄슈타인”.
올해 출간 200주년을 맞았다.
이 책은 고딕풍의 공포스럽고 기괴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인간과 유사한 괴물은 인간이 될 수 있는가, 과학자의 지적호기심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하는 등, 현재에도 여전히 그 의미가 살아있는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이 소설은 특이한 구조를 가진다. 화자가 3명인 이중 액자 구조로서, 다양한 관점으로 이야기를 전해준다. 화자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읽는 우리도 이 이야기를 다양하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

우선 이야기의 구조를 보면 A-B-C-B’-C’로 되어 있다.

A의 화자는 월턴 선장이다. 북극항로를 개척하려고 탐험을 떠난 그가 북극해에서 프랑켄슈타인을 구조한 이야기와, 프랑켄슈타인이 어떻게 최후를 맞이하였는지에 대해 적고 있는데, 이는 편지로 누이인 사빌 부인에게 전해진다.

B의 화자는 프랑켄슈타인이다. 그는 자신이 생명체를 만들어 낸 과정과 그 생명체가 자신 주변의 인물들을 살해한 것, 그래서 그 괴물을 찾아내어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를 자신을 구조한 월턴 선장에게 들려주고 있다.

C의 화자는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생명체이다. 그에게는 이름조차 없다. 그저 괴물이라고 불리는데, 그는 사회에 받아들여지고자 애쓰지만 결국 추한 외모로 인해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깨닫고 프랑켄슈타인에게 자신과 같은 여성 생명체를 만들어 내라고 강요한다.

우리 모두는 다 각자 자기 행위에 대한 변명을 갖는다. 아주 선하기만한 사람도 없고 아주 악하기만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괴물로 불리는 생명체가 자신을 창조한 자로부터 버림받고, 사회로 부터도 추방되어, 생명체에서 괴물로, 괴물에서 악마로 변해가는 과정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프랑켄슈타인조차도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만든 생명체에 대해 갖는 혐오감은 사실 그의 잘못만은 아니다. 그는 그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고, 그의 생명체는 창조자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존재여서 통제가 불가했다. 또한 그가 괴물의 배우자를 만들어 주지 못하는 이유도 그들의 존재가 인류에게 위험이 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포와 비극적 정서가 이 이야기 전반에 흐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아마도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만 상대를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비극의 시작은 바로 거기에 있다. 상대를 나의 입장으로만 바라보는 것.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이 서로 자신의 입장과 상대방의 입장을 나누고 합의하는 과정을 거쳤더라면 이러한 파국상황으로까지 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월턴 선장의 경우는 이와는 달리, 다시 남쪽으로 돌아가자는 선원들의 항의와 북극으로 가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 사이에서 타협을 하고 일단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나는 메리 셸리의 세련됨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야기가 갈등으로 치닫고 결국 파국에 이르고 말지만, 중심이야기의 바깥에서는 타인의 의견 경청과 자신의 욕구 보류라는 해결책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프랑켄슈타인은 2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다. 21세기 현재 더 중요하게 대두되는 문제인 듯하다. 21세기의 프랑켄슈타인은 아마도 호모 데우스, 즉 스스로 신이 되려는 인간일 것이며, 괴물의 존재는 인공지능이 될 것이다. 현재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처럼 인공지능을 발전시켜 현 인류를 뛰어넘는 존재를 만들고 싶은 지적, 기술적 욕구를 가지면서도 인공지능이 우리 인류를 멸망시키지는 않을까하는 공포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새로운 과학기술이 유토피아를 가져올지 디스토피아를 가져올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신기술개발은 너무나 거센 물결이라 아마도 그 방향을 돌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 이 소설이 어느 정도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가장 필요한 것은 각자의 입장과 욕구에 대한 공론화가 아닐까. 하나의 기업체나 기관이 신기술 개발을 하게 되면 그것을 공론화하고 시민사회와의 토론을 이어가야 한다. 합의되지 않은 기술은 일부의 낙관적 기대에도 불구하고 일부에게는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지나친 낙관론이나 공포에 치우지지 않고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정치적인 기술이다. 여기에서 정치적이라는 의미는, 우리는 하나의 사회, 국가, 인류라고 뭉뜽그려 이야기하지 않고, 사회, 국가, 인류가 서로 다른 개인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하나임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서로 다른 개인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의사소통과 합의의 과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 개인으로서는 과학기술에 대해 문외한이긴 하지만, 무작정 두려워하거나 혹은 기대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공부라도 하면서 걱정 또는 기대를 하련다.

감상문의 결론이 너무 교과서적이라 재미가 없긴 하지만, 어쩌랴, 의사소통과 합의가 현재까지 민주사회에서 가장 합리적 방법이라고 합의된 것이고, 또한 아는 게 힘인 것을.

암튼 200년 전 탄생한 괴물이야기에서 새로운 과학기술의 미래까지 생각하게 되다니, 이 책이 한번은 읽어봄직한 문제작임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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