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Reading 읽기이번 생은 망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을 읽고

이번 생은 망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을 읽고

“이번 생은 망했다”라는 말이 유행이다.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자신의 현 상황에 대한 자조 섞인 농담일 것이다.
농담이라고는 해도 “이생망”이라는 말이 하도 널리 쓰이다 보니 하나의 사회현상처럼 보인다.
그런데 도대체 ‘망한 생’이라는 건 뭘까?
그 말을 쓰는 당사자들이 내리는 정의는 그 사람 수 만큼 아주 다양할 것이다.
그러니 나도 여기에서 내 나름의 정의를 내려보련다.
내 생각에 ‘망한 생’이라는 것은 자기가 살아온 삶을 부정하고 싶은 상태가 아닐까?

여기 ‘이생망’의 반대편에 자기 삶에 대한 자부심으로 넘치는 분이 한분 계신다.
2017년 노벨상 수상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있는 나날”의 주인공 스티븐스 씨이다.
그는 영국의 명망가 달링턴 경의 집사로 35년을 일한 사람이다.
지금은 달링턴 하우스가 미국인 사업가 패러데이 씨에게 팔려 패러데이 씨를 모시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집사라는 직업인으로서의 자부심, 전주인인 달링턴 경에 대한 충성심, 저택에서 진행된 비밀회담이 원활히 수행되도록 하여 본인도 세계 역사에 일임을 하였다는 자긍심까지.
인생의 말년에 엿새 간의 여행을 하면서 그는 지나간 자신의 삶을 덤덤히 이야기해 준다.

참으로 잘 산 삶이 아닌가. 후회 없는 삶이 아닌가.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독자들은 점차로 깨닫게 된다.
우리에게 해 준 자신의 과거 내용과는 달리, 이 집사가 하는 행동들은 뭔가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우선 그가 그렇게 강조하던 주인에 대한 충성심은 어디로 갔는지, 누군가 달링턴 경을 아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이 달링턴 경의 집사였다는 사실을 두 번이나 부정한다.
자신이 달링턴 하우스의 집사이긴 하지만, 현주인 패러데이 씨의 집사일 뿐 달링턴 경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듯이. (독일 나치를 도운 전주인의 전적 때문에 그의 평판이 안 좋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달링턴 경이 한 행동들은 다 세계를 위해 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왜 자신까지 그 분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하면서 그는 거리를 둔다.

게다가 그는 집사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그리도 강조해 놓고서는, 자신을 명망 있는 신사로 생각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바로 그러한 척을 하면서, 집사라는 사실을 누가 알아내기라도 할까봐 전전긍긍한다.

여행 마지막 날에 이르러서야 그는 고백한다.
달링턴 경은 죽기 전 본인이 실수 했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자신은 그런 말조차 할 수 없다고.
언어나 일반교양을 갖추는 것보다는 집안관리 기술을 더 갖추는 것이 바로 집사의 직무이자 품위라고 생각해왔던 그에게는 무엇이 괜찮은 삶인가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저 성실히 집사의 직무를 잘 수행했을 뿐인데, 삶의 경로가 본의 아니게 잘못된 게 그의 실수였다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그 직업을 처음 가졌을 때 심어진 직업윤리가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그간 세상의 윤리가 바뀌어 버린 것인지도 모르는 사이 현재에 이르러 버린 것이다.
벌써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는데, 그렇다면 그의 생은 망했단 말인가? 아닐 것이다.
삶은 아직 마무리 되지 않았다. 저녁이 되었다고 하루가 끝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여행 초반 자기기만으로 시작된 그의 과거사가 여행 마지막에는 현실직시로 마무리 되지 않았는가?
벤치의 노인이 말해준대로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가 아닌가?
스티븐스 씨의 저녁 이후의 삶은 더 이상 부정되지 않는 삶이길 바란다.
삶이 끝날 때까지 망한 생은 없으며, 설혹 망한 채로 삶이 끝나더라도 그 삶은 당사자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이번 생이 망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나의 삶도 그렇고, 당신의 삶도 그렇다.
나의 삶은 오후에 접어들었으며, 나에게는 오후가 하루 중 가장 좋은 때이다.
당신의 삶이 아직 오전에 머물러 있다면, 하루 중 오전이 가장 활기찬 때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번 생은 망했다”라는 말이 사회의 진짜 면면을 보여주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는 제발 단지 농담으로만 하는 얘기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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