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울립이 활짝 피었다.

튜울립이 활짝 피었다. 피어도 피어도 너무 피었다. 몽오리 진 꽃다발일 때는 그리도 예쁘더니 활짝 펴서 고개까지 살짝 숙인 튜울립 다발은 탁자위에 계속 둘 것인가 치울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꽃의 형태는 몰라도 꽃잎의 색은 여전히 붉은 게 아직은 그 아름다움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당분간은 그냥 두기로 하였다.

꽃의 입장에서는 만개하는 게 너무 당연한 건데, 활짝 피었다고 타박하는 내가 우습긴 했다. 하기는 내가 식물이나 꽃에 대해서는 진짜로 아는 바가 없는 사람이긴 하다. 그나마 이 꽃이 튜울립인지 아는 정도이다.
꽃이라고 하면 꽃이름이나 꽃향기, 꽃말 같은 아름다운 것들 보다는 꽃잎이 피보나치 수열을 이룬다는 것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피보나치 수열을 떠 올리니 갑자기 궁금해졌다. 튜울립은 잎이 몇 개던가? 3개? 5개? 아니면 8개? 태어나서 처음으로 꽃잎의 개수를 세어 보았다. 하지만 튜울립의 꽃잎 개수는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피보나치 수열에 없는 6개였다. 급하게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튜울립은 예외라고 했다. 왜냐하면 실상은 6개 중 3개만 꽃잎이고 나머지 세 개는 꽃받침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알고자하니 모든 것이 신기했다. 꽃이라는 존재가. 그동안 너무나 무심했던 것에 대해 반성하는 의미로 만개한 꽃 속을 들여다 보았다.

그런데 이건 몽오리 진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별세상이 아닌가?
부드러운 꽃잎 안에 견고한 땅콩같은 게 삼발이 모양으로 중앙에 꽂혀있었다(이것도 검색해 보니 꽃의 암술이라고 했다). 그 주위로는 짙은 초콜렛 색의 병 닦는 긴 솔 같은데 둘러져 있었다(이것은 수술이었다). 붉은 색과 초콜렛 색 사이는 화선지 물 먹은 듯 색 퍼짐이 예술적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꽃의 화가라고 불리는 조지아 오키프가 왜 그렇게 꽃을 사랑해서 왜 그렇게 꽃 그림을 많이도 그렸는지, 그 심정을 100분의 1 쯤은 이해할 것 같았다. 오키프의 꽃들은 진짜 꽃의 몇 십배의 크기로 확대되어서 추상화 같은 느낌을 준다. 나한테는 튜율립의 꽃 속도 그랬다. 현실적이지 않고 몽환적이며 선명하지 않고 흐릿한 느낌이 낮에 꾸는 꿈 같았다.

몽오리 진 꽃들은 측면에서만 바라 볼 때가 많았다. 물론 그 모습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마치 벌이 꽃 안에 들어가서 꿀을 빨 듯, 꽃 속의 모습을 들여다 보니 내 눈에는 이 모습이 더 아름다워 보였다.

이 모습으로 벌과 나비 새들을 유혹했겠지.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 꽃의 아름다움은 결국 생존을 위한 것이었구나. 반면 생존을 위해 뭔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름다움이고.

만개한 꽃을 버릴까 말까하다가 생존의 문제에까지 다다르다니 너무 멀리 갔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생각의 끝은 결국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즉, 어떻게 살 것인가로 귀결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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