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부름”을 읽고

오늘 아침엔 ‘포토 에세이쓰기’ 코치님께서 김춘수 시인의 “꽃”을 리드문으로 올려주셨어요.
예전부터 참 좋아하던 시였죠. 아마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애송하는 시가 아닐까 싶어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 시에 나오는 시구처럼,
우리 모두는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꽃이 될 수 있는 존재인가 봅니다.
어쩌면 꽃은 비유적인 의미이고, 실제로는 말 그대로 이름을 불리운 자만이 그 사회 혹은 그 집단 혹은 친구사이 혹은 사랑하는 자들 사이의 한 성원이 될 수 있다는 의미도 되겠지요.
호칭이라는 것은 혼자 있을 때는 큰 의미가 없으니까요.

오랜만에 김춘수님의 꽃을 읊조리다 보니 며칠 전에 읽은 “야성의 부름”이 생각나네요.

문명사회의 화목한 가정 내에서 반려견으로 사랑 받으면 살아가던 개 ‘벅’이 어떻게 납치당해 썰매개가 되었는지, 썰매개로 살면서 어떻게 옛 시대의 야성을 회복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늑대들의 부름에 응답하여 인간 세상을 떠나 늑대들의 우두머리인 유령개가 되었는지를 이야기해주는 책입니다.

벅이 야성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여전히 인간 사회 내에 존재하는 개로만 머물렀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몸 속에 야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더라도요.
하지만 벅은 야성의 집요한 부름에 응답하였고, 인간 세상에서 태어났으나 그 세상을 버리고 원래 태고 적에 자신이 속하였던 집단으로 돌아갑니다.

나는 이 책을 왜 이제야 읽은 걸까요?
이런 책은 어렸을 때 읽었어야 했는데, 반백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 이걸 읽고는 나의 야성은 왜 진작 나를 부르지 않았을까. 하고 의문을 갖게 되네요.
하지만 지금이라도 야성이 부른다면 갈 수 있을까.
거기에 바로 예. 라고 말할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건강한 신체와 강인한 정신을 가진 자만이 야성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벅처럼 강하지 않았던 썰매 개들은 문명과 야생의 중간 지점에 해당하는 썰매 개 사회에서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는데, 야생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허약한 자들을 위해서는 문명사회가 더 인간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에 또 생각을 하다 내린 결론은, 이미 야생에서 살 수 없는 몸과 마음을 가진 나는 문명사회의 부름에 응답하는 삶을 살기로 하자. 였습니다.^^

해설을 보니 벅을 니체의 위버멘쉬(Übermensch)와 비교하기도 하던데, 저는 보통사람인, 그냥 멘쉬(Mensch)로 살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니체가 비판한 최후의 인간(der letzte Mensch)에서는 벗어난 존재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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