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셸리

지난 달엔 1792년에 여성의 권리 옹호라는 책을 쓰신 

메리 울스턴크레프트의 모습을 그렸었는데, 

오늘은 그의 딸인 메리 셸리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의 작가로 세계문학에 이름을 남기신 분이다.

프랑켄슈타인은 1818년에 출간되었고, 올해로 200주년을 맞았다.

 

200주년 기념으로 올해 그 책을 다시 읽었는데, 

다시 읽어도 옛날스런 느낌 없이 너무 재밌다. 

과학소설의 효시로 불리는대로, 

당시 과학의 분위기와 과학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읽을 수 있는데,

과학이 발전을 가져오리라는 희망도 있지만, 그것이 우리 삶을 황폐화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려진다. 

21세기 현재 우리의 기대, 공포와 다를 바가 없다.

 

인터넷에서 이 분의 초상화 이미지를 찾아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그려보았다. 

 

그림도구 : procreate

2018년 2월에 읽은 책들

2월도 다 지나갔습니다.
2018년은 유독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더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하니, 2018년의 지금 이 시간이 가장  빨리 흐르는 게 맞긴 하겠네요.

서설이 길었습니다. ^^

2월이 지났으니 2월 독서목록을 올려보도록 할게요.

 

문학작품

01. 몬테크리스토 백작 1, 알렉상드르 뒤마 저, 오증자 역, 민음사, 2002
02. 몬테크리스토 백작 2, 알렉상드르 뒤마 저, 오증자 역, 민음사, 2002
03. 몬테크리스토 백작 3, 알렉상드르 뒤마 저, 오증자 역, 민음사, 2002
04. 몬테크리스토 백작 4, 알렉상드르 뒤마 저, 오증자 역, 민음사, 2002
05. 몬테크리스토 백작 5, 알렉상드르 뒤마 저, 오증자 역, 민음사, 2002

한 권당 4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두께에 전체가 5권이라 읽을까 말까 고민을 좀 했지만, 역시 읽기를 잘 했어요.
누가 그랬죠.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들은 재미있어서 많이 읽히다 보니 고전이 된 거라고.
그 말에 딱 맞는 책이 바로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아닐까 싶네요.
과거에 잘못을 저지른 이들, 누구하나 피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파멸하는 장면을 읽다보면  아주 통쾌하죠.
그런데 말예요. 소설의 세계에서 떠나 현실을 생각해보면 좀 씁쓸한 마음이  들어요.
결국 복수는 아무나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복수는 복수하려는 자가 복수대상자들보다 더 부유하거나 권력이 있거나 능력이 뛰어나야만 가능하죠.
그렇지 않을 경우는 희생자는 복수고 뭐고 저절로 세상에서 잊혀지고 소멸되겠죠.
이건 뤼팽이나 프랑켄슈타인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점인데요, 뤼팽도 남들보다 뛰어난 변장술이 없었다면 괴도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도 인간보다 특출난 능력이 없었다면 자신의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에게 복수할 수 없었을 겁니다.
시원하면서도 찜찜한 이 기분. ㅜㅜ

06.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아르센 뤼팽 전집 1, 모리스 르블랑 저, 바른번역 역, 코너스톤, 2015

07.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저, 임종기 역, 문예출판사, 2008 (2독, 전에는 열린책들 번역으로 읽음)

* 프랑켄슈타인 리뷰는 며칠 전에 올렸었죠.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책입니다.

 

에세이

08.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저, 서해문집, 2016

은유님 글이 그냥 좋아서 자꾸 사서 읽게 되네요. “쓰기의 말들”도 샀지요. 엄청 기대 됩니다.

09.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정문정 저, 가나출판사, 2018

 

글쓰기

10. 소설가의 일, 김연수 저, 문학동네, 2014

소설을 쓰려면 이 공식을 반드시 기억해야 해요.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 + 그에게 없는 것)/ 세상의 갖은 방해 = 생고생(하는 이야기)

 

주인공은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은 죄로, 생겨서는 안 될 욕구가 생긴 인물입니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과정에서 그는 세상의 방해로 좌절하거나 혹은 그것을 극복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욕구가 충족이 되는 결론이더라도 그는 생고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생고생을 하지 않는다면 주인공이 아닙니다.
소설에서는 몰라도 실제 삶에서는 주인공 따위 되고 싶지 않군요.
그냥 평범하게 개고생 따위 모르고 살고 싶어요. ㅜㅜ
하지만 나중에 소설을 쓰게 된다면 나의 주인공은 험난한 골짜기를 엄청나게 굴러야만 하겠지요. 벌써 감정이입 되어서 슬퍼지네요.

11. 글쓰는 삶을 위한 일 년, 수전 티베르기앵 저, 김성훈 역, 책세상, 2016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책 이예요.
이 책 덕에 지난밤 꿈 이야기들을 눈 뜨자마자 적어 두곤 하는데, 나중에 이 이야기들이 훌륭한 글감으로 사용될 거 같아요.
(훌륭한 글이 될 거 같다고는 안했어요. 그건 아직 자신이 없어서….)

인문/사회

12. 프랑켄슈타인, 장정희 저, 살림, 2004

소설 프랑켄슈타인 해설서입니다. 소설 읽고 이 책 읽으면 금상첨화.

13. 북유럽 신화, 닐 게이먼 저, 박선령 역, 나무의철학, 2017

몇 년 전에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 3권을 읽었는데요, 그 때는 모든 게 낯설어 이름도 헷갈리고 지명도 헷갈리고 내용도 난해한 거 같더니, 두 번째로 북유럽 신화를 읽으니 이제서야 좀 이해도 가고 재미있네요.
세계의 끝 이야기는 아무래도 유럽에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닐까 의심이 돼요. 성경의 요한계시록이랑 비슷한 장면이 너무 많이 나오거든요.

14. 명견만리 : 새로운 사회, KBS 명견만리 제작진 저, 인플루엔셜, 2017

1권, 2권은 지난달에 읽고 이번에 세 번째 책을 읽었습니다.
새로운 사회라는 부제에 걸맞게 향후 근 미래의 모습이 어떻게 바뀌어 갈지를 예측하여 보여주고 있어요.
실제로 세상이 그렇게 바뀔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읽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리지도 않으니 교양으로 읽어두면 모임에서 대화를 나눌 때에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과학

15.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팀 르윈스 저, 김경숙 역, Mid, 2016

과학책이라기보다는 철학책에 가깝습니다.
즉, 읽기가 어려웠다는 얘기죠.^^ (철학책이 제일 어려워요. ㅜ ㅜ)
포퍼의 변증가능성 문제, 쿤의 패러다임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과학의 정치적 영향력, 진화론에서의 이타주의 문제, 자유의지의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데, 저자의 서술 방식이 명확한 의견 피력이 아니라서 주장하는 바가 뭔지가 명확하지 않더군요.
나는 과학적 지식에 아직은 문외한이라서, 이렇게 문제제기를 하는 책 보다는 정보를 주는 책을 먼저 읽었어야 했나 봅니다.

16. 과학잡지 에피 1호, 이음 편집부, 이음, 2017

과학비평을 표방한 잡지입니다.
이번호의 주제는 ‘가짜’인데요, 가짜는 거짓인가? 라는 질문을 가지고 여러 가지 분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특히 라이고 중력파 검출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웠는데요.
2010년에도 한번 중력파 검출기에 신호가 잡혔었답니다.
이 신호의 분석을 위해 엄청나게 많은 인력이 잠도 안자고 연구 분석에 매달렸는데,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이 신호가 눈가림 신호(가짜)였다고 합니다.
이는 라이고의 자료 분석 방법이 진짜 중력파를 관측할 수 있는지 시험한 것 이였고, 이러한 검증을 통해 2015년 발견된 신호가 진짜 중력파임을 입증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가짜 신호가 없었다면 진짜 신호인지 가짜 신호인지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없었다는 얘기죠.
가짜는 거짓인가? 물론 가짜가 진짜는 아니겠죠.
하지만 진짜의 조력자 역할을 할 수도 있다니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 기사 말고도 재미난 기사가 많았어요.
구입하기 편하게 이북으로도 출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음 출판사 대표님 부탁드려요!!)

이상으로 총 16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진다면 야외활동에 시간을 많이 쓰겠지만, 당분간은 맹추위가 이어질 듯하니 3월에도 집에 틀어박혀 부지런히 독서를 하지 않을까 싶네요.

3월… 현실은 아직 겨울이지만 마음은 벌써 봄이 온 듯 싱숭생숭.
조심해야지. 이러다 감기 들라. 모두 감기 조심하시고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와 21세기 호모데우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읽고

과학소설의 효시라 불리는 “프랑켄슈타인”.
올해 출간 200주년을 맞았다.
이 책은 고딕풍의 공포스럽고 기괴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인간과 유사한 괴물은 인간이 될 수 있는가, 과학자의 지적호기심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하는 등, 현재에도 여전히 그 의미가 살아있는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이 소설은 특이한 구조를 가진다. 화자가 3명인 이중 액자 구조로서, 다양한 관점으로 이야기를 전해준다. 화자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읽는 우리도 이 이야기를 다양하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

우선 이야기의 구조를 보면 A-B-C-B’-C’로 되어 있다.

A의 화자는 월턴 선장이다. 북극항로를 개척하려고 탐험을 떠난 그가 북극해에서 프랑켄슈타인을 구조한 이야기와, 프랑켄슈타인이 어떻게 최후를 맞이하였는지에 대해 적고 있는데, 이는 편지로 누이인 사빌 부인에게 전해진다.

B의 화자는 프랑켄슈타인이다. 그는 자신이 생명체를 만들어 낸 과정과 그 생명체가 자신 주변의 인물들을 살해한 것, 그래서 그 괴물을 찾아내어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를 자신을 구조한 월턴 선장에게 들려주고 있다.

C의 화자는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생명체이다. 그에게는 이름조차 없다. 그저 괴물이라고 불리는데, 그는 사회에 받아들여지고자 애쓰지만 결국 추한 외모로 인해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깨닫고 프랑켄슈타인에게 자신과 같은 여성 생명체를 만들어 내라고 강요한다.

우리 모두는 다 각자 자기 행위에 대한 변명을 갖는다. 아주 선하기만한 사람도 없고 아주 악하기만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괴물로 불리는 생명체가 자신을 창조한 자로부터 버림받고, 사회로 부터도 추방되어, 생명체에서 괴물로, 괴물에서 악마로 변해가는 과정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프랑켄슈타인조차도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만든 생명체에 대해 갖는 혐오감은 사실 그의 잘못만은 아니다. 그는 그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고, 그의 생명체는 창조자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존재여서 통제가 불가했다. 또한 그가 괴물의 배우자를 만들어 주지 못하는 이유도 그들의 존재가 인류에게 위험이 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포와 비극적 정서가 이 이야기 전반에 흐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아마도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만 상대를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비극의 시작은 바로 거기에 있다. 상대를 나의 입장으로만 바라보는 것.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이 서로 자신의 입장과 상대방의 입장을 나누고 합의하는 과정을 거쳤더라면 이러한 파국상황으로까지 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월턴 선장의 경우는 이와는 달리, 다시 남쪽으로 돌아가자는 선원들의 항의와 북극으로 가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 사이에서 타협을 하고 일단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나는 메리 셸리의 세련됨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야기가 갈등으로 치닫고 결국 파국에 이르고 말지만, 중심이야기의 바깥에서는 타인의 의견 경청과 자신의 욕구 보류라는 해결책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프랑켄슈타인은 2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다. 21세기 현재 더 중요하게 대두되는 문제인 듯하다. 21세기의 프랑켄슈타인은 아마도 호모 데우스, 즉 스스로 신이 되려는 인간일 것이며, 괴물의 존재는 인공지능이 될 것이다. 현재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처럼 인공지능을 발전시켜 현 인류를 뛰어넘는 존재를 만들고 싶은 지적, 기술적 욕구를 가지면서도 인공지능이 우리 인류를 멸망시키지는 않을까하는 공포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새로운 과학기술이 유토피아를 가져올지 디스토피아를 가져올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신기술개발은 너무나 거센 물결이라 아마도 그 방향을 돌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 이 소설이 어느 정도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가장 필요한 것은 각자의 입장과 욕구에 대한 공론화가 아닐까. 하나의 기업체나 기관이 신기술 개발을 하게 되면 그것을 공론화하고 시민사회와의 토론을 이어가야 한다. 합의되지 않은 기술은 일부의 낙관적 기대에도 불구하고 일부에게는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지나친 낙관론이나 공포에 치우지지 않고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정치적인 기술이다. 여기에서 정치적이라는 의미는, 우리는 하나의 사회, 국가, 인류라고 뭉뜽그려 이야기하지 않고, 사회, 국가, 인류가 서로 다른 개인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하나임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서로 다른 개인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의사소통과 합의의 과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 개인으로서는 과학기술에 대해 문외한이긴 하지만, 무작정 두려워하거나 혹은 기대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공부라도 하면서 걱정 또는 기대를 하련다.

감상문의 결론이 너무 교과서적이라 재미가 없긴 하지만, 어쩌랴, 의사소통과 합의가 현재까지 민주사회에서 가장 합리적 방법이라고 합의된 것이고, 또한 아는 게 힘인 것을.

암튼 200년 전 탄생한 괴물이야기에서 새로운 과학기술의 미래까지 생각하게 되다니, 이 책이 한번은 읽어봄직한 문제작임은 확실하다.

참을 수 없는 경어의 복잡함

초판 출간 2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켄슈타인을 다시 읽었다.
몇 년전에 1831년 판을 번역한 열린책들 버전을 읽었으므로, 이번에는 1818년 초판본을 옮겼다는 문예출판사 버전을 읽었다.

그런데, 이게 처음부터 완전히 다른 책을 읽는 느낌이었다.
열린책들은 월턴이 손위 누나인 사빌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하는데, 문예출판사는 그 사빌부인이 누나가 아니라 여동생이기 때문이었다.

누님에게는 엄청나게 공손한 존대말로 상황보고를 하는데, 누이 동생에게는 친절한 평상어를 쓰고 있었다.
영어의 sister 만으로는 누나인지 여동생인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역자가 임의로 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월턴이 프랑켄슈타인을 깨진 빙하에서 구조한 후, 둘이 대화를 할 때 보면 열린책들은
월턴은 경어를, 프랑켄슈타인은 하오체를 쓰고, 문예출판사는 하게체를 쓰고 있다. 하게체를 쓰기에는 월턴과 프랑켄슈타인의 나이차가 얼마 안나는 것 같아서 좀 뜨아~ 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번역에 따라 경어의 수준을 다르게 적용하였는데, 그 뉘앙스가 너무 다르다.
같은 이야기 다른 느낌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나이, 계층, 성별에 따라 써야하는 경어가 다 다르기 때문에 초면부터 호구조사에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이름을 막 부르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 호칭을 붙이려면 나이랑 하는 일 등등을 아는 것이 필수렸다.
언니인지 동생인지 아무개씨라고 부를지, 아무개님이라고 부를지….선생님이라고 부를지… 어떻게라도 상대를 부르려면 뭐라도 붙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기요~ ‘라는 이상한 말로 부르는 수 밖에.

거의 눈치 게임 수준이다.

일상에서도 이럴진데, 외국문학을 번역할 때 등장인물의 나이, 계층 등의 정보가 부족할 경우, 번역가가 경어를 쓸지 평어를 쓸지 꽤 고민을 해야만 할 거란 생각이 든다.

암튼 책의 내용이 중허지, 존대말인지 반말인지가 중헌건 아니니까.
느낌적 느낌들은 접어두고 내용에 집중하여 일단 책을 다 읽었다.

원래는 독서 감상문을 쓰려고 했으나, 현재 몸이 많이 피곤하여 생각을 깊게 하기도 어렵고, 처음 책을 열었을 때 존대말 반말의 뉘앙스 차이가 너무 크게 느껴져 일단 워밍업으로 경어의 복잡함에 대해 썼다.

프랑켄슈타인 독서감상문은 머리 맑을 때 재시도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