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을 지키고 삶의 질을 높이기

내가 원래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말대답도 꼬박꼬박 잘했고, 수업시간 중에 궁금한 게 생기면 꼭 물어봐야 했다. 회사생활 중에도 상사한테 따박 따박 따지다가 많이 혼나기도 했다.

그랬던 내가, 독일 생활 20년을 지내는 사이 말 수가 점점 줄었다.
물론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하고 싶은 말에 비해 할 수 있는 말의 경우가 훨씬 적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외국에서 현지어를 하는 것은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무 안일하게 대처를 해 왔다. 아웃사이더로서 살기에는 언어를 못해도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종종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주로 병원에서 발생하는 경우로 한참 이야기를 하던 의사선생님이 갑자기 “이제부터 영어로 얘기할까요?”하고 물을 때이다. 내가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아서 답답해서 그러는 것이겠지. 관공서나 학교에서는 그런 일이 드문데 병원은 많은 경우 그랬다. 그래서 내가 따로 이름을 붙였다. “병원 굴욕”이라고.

선생님이 이제 영어로 할까요? 물으면 좋아요, 그렇게 하세요. 하고 대답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갑자기 이러고 살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을 지키고 살려면 언어 공부를 위해 뭐라도 투자해야 할텐데.
독일어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어마어마하게 많은 비용과 시간을 썼는데도, 그에 비례하여 실력이 늘지도 않고…
차라리 지금부터는 영어 공부를 할까? 독일어 보다는 영어가 좀 더 배우지 쉽지 않을까? 영어도 독일어랑 마찬가지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일까?

고민 고민하다 묘안을 하나 내었다.
독일어 공부도 하고 영어 공부도 할 수 있는 일타쌍피의 방법! 숭례문 학당 필사코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내가 변형한 독영 대조 필사하기.
일단 서점에 가서 책을 둘러보았다. 독영 대조 책에서는 마음에 드는 게 별로 없어서 원서 코너에 갔다. 얇기도 하고 좋은 문체로 소문나 있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골랐다. 100페이지 정도로 아주 맘에 들었다. 그리고나서 독일어 번역본도 샀다.

경건한 마음으로 노트 왼쪽에 영어 한페이지, 오른쪽에 독일어 한페이지를 베껴 썼다.
엄청나게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벌써 팔이 아프기 시작했다.
이건 장기간 필사에 대한 부담 때문에 생긴 심리적 압박일까? 아니면 실제로 안 쓰던 글씨를 써서 느끼는 물리적 통증일까?

자존심을 지키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단 열매를 따기 위해서는, 쓴 인내를 견뎌야겠지.
하… 두 번째 페이지는 시작도 못했는데, 벌써 쓰다 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