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없는 땅, 유토피아 -문강형준의 “파국의 지형학”을 읽고

*본문은 책을 읽고 난 후의 감상문입니다. *이책의 요약을 보실 분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십시오. (책 요약) 파국의 지형학 살아있는 유기체의 운명은 죽음을 향한다.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사회적 유기체로 여겨지는 문명이나 사회, 국가 등도 마찬가지의 운명을 지녔다. 생성되고, 발전 혹은 유지되다가 소멸하는 굴레. 고대문명사회의 멸망이나 로마제국의 쇠퇴, 사회주의 국가들의 해체 등 역사가 이를 보여주고 있다. 소멸을 향해 가는 사회는 모두 아포칼립스적 상황을 맞게 된다. 어쩌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역시 신자유주의적 질병을 앓고 스러져가는 파국의 상황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음울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저자는 현재의 파국의 상황이 오히려 유토피아로 갈 수 있는 기회임을 역설한다. 그는 여기에서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이 냉소와 허무주의이며, 냉소와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열정과 과잉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반-유토피아주의자이자 회의주의자인 존 그레이를 비판한다. 인간주의도 진보도 역사도 진리도 가치도 그레이에게는 모두 판타지에 불과하며, 세상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디자인하려는 ‘유토피아 기획’을 그는 혐오한다. 그는 유토피아의 대안으로 현실주의를 주장하는데, 미래에 대한 비전보다는 현재 발생 가능한 재난을 막는 데에 더 치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비판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내가 저자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이 학자의 의견에 몹시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강조하는 열정과 과잉의 가치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다만 그간 사회의 재난과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가 진일보하는 데 열정과 과잉이 기여한 바 크지만, 실제적으로 유토피아의 도래를 이끌어 낸 적이 있던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것이고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것이다. 회의주의자를 자처하는 나의 선택지는 결코 유토피아가 될 수는 없다. 유토피아를 이루는 사회 역시 하나의 유기체로서 생성 발전 유지 소멸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 파국의 기회를 잡자고 했지만 정작 본인이 어떤 형태의 유토피아를 꿈꾸는지 제시하지 않는다. 아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두 인정하는 한 가지 형태의 유토피아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군가에게는 유토피아가 누군가에게는 디스토피아 일 수 있다. 정작 신자유주의를 완전히 극복한 완벽히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가 도래한들 그 사회에 영원히 균열이 발생하지 않을까? 균열이 발생한다면 그 결과는 결국 파국일 것이다. 어쩌면 인류가 생겨난 이래 우리의 삶은 늘 파국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갈라진 곳을 메꾸고 봉합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왔다. 파국은 또 다른 사회를 만들었지만 그 사회 역시 또 파국을 맞이했다. 편안하고 아름답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은 결국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땅, 바로 유토피아일 뿐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유토피아를 막연하게나마 그려보면 과연 그곳에서 내가 행복할지 의문이 든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플라톤의 이상국가,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후의 공산주의 사회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꿈꾸는 우파 유토피아. 나는 그 어디에서도 절대로 살고 싶지 않다. 계시록의 아마겟돈 이후 천년왕국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듯 저자에게 철저히 동의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너무 재미있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읽었다. 주변 지인들에게 추천까지 했다. 저자가 이야기를 끝말잇기처럼 자연스럽게 끌어가고, 중간에 유명한 철학자들의 사상도 쉽게 소개해주고, 영화나 소설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지루하지 않게 배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을 위해서는 최고로 친절하고 다정한 저자라고 할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