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발된 이야기의 시작

며칠 전 이었다. 추위에 어깨를 움추리고 주택가 골목길을 종종종 걷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걸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멈추어 서서 주변을 자세히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특이한 게 있었다. 얼른 핸드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었다. 한 장. 두 장. 세장.

보통 가로수들은 지나다니는 차나 보행자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아야 한다. 가지가 위로 높이 솟는 건 상관없지만, 옆으로 퍼지는 건 문제가 있어서 그런지, 내가 알고 있는 가로수들은 나무 기둥을 기준으로 최대 45도 각도로 해서 가지들이 위로 가지런히 올라가는 게 대부분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그 날 내가 본 가로수 세 그루는 각각의 가지들이 트위스트를 추고 있었다. 꼬불 꼬불 왔다 갔다 하며 춤을 추었다. 도시의 가로수 느낌이 아니라 전설의 숲 속 나무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규칙적인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렇게 카오스적인 데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낀다. 나무들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옛 이야기들처럼 나무가 돌아다닐 수 있다면, 걸어 다니는 나무들은 아마도 이런 카오스적 형태를 하고 있을 것이다.

더 희한했던 건 주변의 나무들은 모두 가지런하여 아무 일 없는 듯이 평온한 데, 유독 연달아 서 있는 세 그루의 나무만 요동을 치고 있는 점이었다. 이 나무들 밑에서 필시 무언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 생각은, 그리하여 주택가 골목길 지하로 깊숙히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에 오래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얼른 집에 돌아가야 하니까. 밖이 춥기도 하고…

내가 작가였다면, 여기에서 재미난 이야기가 시작 되었을텐데, 하고 아쉬워하며 다시 길을 걸었다.

(원고지 4.9장)

오늘은 공치지 않았다.

오늘은 공치지 않았다.
과거를 돌아보자면 새해 시작부터 아무 일도 못하고 공친 경우가 많았다. 작년만해도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보냈었다. 31일과 1일 사이에는 늘 분주하고 번잡하고 재미난 행사나 모임이 있어 정작 새해는 에너지 고갈 상태로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올해 1월 1일은 100일 글쓰기의 첫날이라는 중요한 의미가 부여되어, 미리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31일에 절대 오바하지 말 것. 그 결과로 1월 1일 아침에 이렇게 조용히 소파에 앉아 커피 한 잔 마시며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오바하지는 않았지만, 할 거는 다했다. 
새해를 함께 맞으러 동네친구도 놀러왔고, 떡국도 한 그릇 미리 끓여먹었고, 2019년 0시 0분에 나와 남편과 아들과 친구는 다 같이 집밖으로 나가 폭죽도 터뜨렸고, 축하 샴페인도 마셨다. (아들도 한 잔 주려고 무알콜 샴페인으로^^) 

2019년은 시작이 좋다. 1월 2일부터가 아니고, 1월 1일부터 한 해를 시작할 수 있어서. 

이 글을 쓰다보니 2019년의 모토를 “오바하지 말 것”으로 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 멋진 말로 포장해 보자면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나 할까. 과유불급이라… 과유불급…이 말에 걸맞게 오늘은 그만 써야겠다.^^

(원고지 3.6장)

나의 사랑하는 산책로

저는 출퇴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라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냅니다.
그렇다고 별도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라 운동량이 어마 어마하게 적죠.
그래서 결심한 바가 산책입니다.
주 5회 이상은 한 시간 이상 산책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특별한 산책로를 다니는 건 아니고, 동네 주택가 골목을 이 골목 저 골목 다닙니다.

오늘 낮에 “발상”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어요. 거기에 보면 영감의 원천의 하나로서 걷기와 산책을 추천하고 있더군요.
니체와 한트케, 구스타르 말러, 칸트 그 외 수많은 예술가와 사상가 들이 걷기를 통해 영감을 얻은 예들이 나옵니다.

“움직이면서 생각하기. 이것은 수많은 예술가와 사상가를 통해 확인된 아주 오래된 방법이다.
(중략)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매일 점심식사 후에 항상 산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수첩과 지휘봉을 들고 아내와 함께 산책을 했다.”

읽다가 이 부분에 꽂혔는데요, 그 이유는 너무 단순합니다.
제가 즐겨가는 산책 코스 중에 길 이름이 쿠스타프 말러 플라츠 라는 곳이 있거든요.^^

주택가 골목길을 굽이굽이 걷다가 보면 갑자기 넓게 화악~ 펼쳐지는 초록의 전경.
집에서 좀 많이 걸어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갑작스럽게 초록 세상에 입장하는 순간이 일종의 마법같아서 그 재미에 종종 갑니다.

이곳이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인 말러와 특별히 연관된 장소는 아닐 거 같아요.
거리 이름이나 광장이름에 유명인사의 이름을 워낙 많이 갖다가 붙이니까, 여기도 그냥 유명 작곡가의 이름을 붙인거겠죠.
그래도 반갑네요.

이 곳을 산책할 때 마다 말러가 산책을 하면서 곡의 영감을 받은 것처럼, 나도 무언가 영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생기고요.^^

태고적 기억, 블루 스카이

하늘이 파랬습니다. 구름도 없이.
산책길에 올려다 본 하늘의 색이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어 보았어요.
파랗긴 하지만 그렇게 강렬하게 파랗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은은한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파란색은 보통 차가운 색으로 분류되지만, 이런 하늘은 차갑다기 보다는 오히려 따뜻한 느낌을 주네요.
왠지 머나 먼 옛 기억을 소환하는 기분이랄까요.
아마도 우리의 먼먼 조상이 아프리카의 사바나 초원에서 살 때 늘 바라보던 것이 넓게 펼쳐진 초원의 초록색과 하늘의 파란색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태고적 원형을 바라볼 때 얻는 안정감이랄까.
우리가 초원의 초록과 하늘의 파랑에 정서적 반응을 보이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파랗기만 한 하늘을 보니, 온통 파란색인 이브 클라인의 작품, IKB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을 봤을 때 느꼈던 충격이 떠오릅니다.
그 작품을 봤을 때 느낀 강렬한 정서에 대비해서 오늘의 하늘은 평온한 정서를 불러 일으킵니다.
다른 날은 또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오늘만큼은 클라인 블루보다 오늘 바라본 스카이 블루가 훨씬 더 좋네요.

(* 이 글은 4월 29일에 쓴 글입니다. )

자존심을 지키고 삶의 질을 높이기

내가 원래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말대답도 꼬박꼬박 잘했고, 수업시간 중에 궁금한 게 생기면 꼭 물어봐야 했다. 회사생활 중에도 상사한테 따박 따박 따지다가 많이 혼나기도 했다.

그랬던 내가, 독일 생활 20년을 지내는 사이 말 수가 점점 줄었다.
물론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하고 싶은 말에 비해 할 수 있는 말의 경우가 훨씬 적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외국에서 현지어를 하는 것은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무 안일하게 대처를 해 왔다. 아웃사이더로서 살기에는 언어를 못해도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종종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주로 병원에서 발생하는 경우로 한참 이야기를 하던 의사선생님이 갑자기 “이제부터 영어로 얘기할까요?”하고 물을 때이다. 내가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아서 답답해서 그러는 것이겠지. 관공서나 학교에서는 그런 일이 드문데 병원은 많은 경우 그랬다. 그래서 내가 따로 이름을 붙였다. “병원 굴욕”이라고.

선생님이 이제 영어로 할까요? 물으면 좋아요, 그렇게 하세요. 하고 대답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갑자기 이러고 살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을 지키고 살려면 언어 공부를 위해 뭐라도 투자해야 할텐데.
독일어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어마어마하게 많은 비용과 시간을 썼는데도, 그에 비례하여 실력이 늘지도 않고…
차라리 지금부터는 영어 공부를 할까? 독일어 보다는 영어가 좀 더 배우지 쉽지 않을까? 영어도 독일어랑 마찬가지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일까?

고민 고민하다 묘안을 하나 내었다.
독일어 공부도 하고 영어 공부도 할 수 있는 일타쌍피의 방법! 숭례문 학당 필사코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내가 변형한 독영 대조 필사하기.
일단 서점에 가서 책을 둘러보았다. 독영 대조 책에서는 마음에 드는 게 별로 없어서 원서 코너에 갔다. 얇기도 하고 좋은 문체로 소문나 있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골랐다. 100페이지 정도로 아주 맘에 들었다. 그리고나서 독일어 번역본도 샀다.

경건한 마음으로 노트 왼쪽에 영어 한페이지, 오른쪽에 독일어 한페이지를 베껴 썼다.
엄청나게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벌써 팔이 아프기 시작했다.
이건 장기간 필사에 대한 부담 때문에 생긴 심리적 압박일까? 아니면 실제로 안 쓰던 글씨를 써서 느끼는 물리적 통증일까?

자존심을 지키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단 열매를 따기 위해서는, 쓴 인내를 견뎌야겠지.
하… 두 번째 페이지는 시작도 못했는데, 벌써 쓰다 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