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자기 스타일 컵받침 만들기 워크샵 후기

보자기 스타일로 만든 모시 컵받침

지난 10월 1일 바느질 워크샵을 진행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보자기 스타일로 작은 컵받침을 만드는 체험학습이었다. 

베를린에 있는 한국문화원에서는 10월쯤 Open House Day 행사를 하는데, 그 때 독일 방문객들에게 한국문화를 소개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그러한 프로그램의 하나로 보자기 바느질 워크샵이 개설되었고, 내가 강의를 맡게 되었다.

바느질을 이십년정도 하긴 했지만, 보자기 전문가도 아닌 내가 왜 강의를 맡게 되었을까? 그건 순전히 이 곳이 베를린이기 때문이었다. 한 15년쯤 전에 바로 이 문화원에서 규방공예와 보자기 수업을 한 1년반 정도 배웠었는데, 그게 내가 바로 수업을 맡게 된 이유였다.   베를린의 한인사회라는 작은 풀(Pool) 안에서 보자기 바느질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나는 베를린의 삶을 좋아하면서도 불만을 같이 가지고 있었는데, 뭔가 새로운 일을 도모 하기에는 외국에 사는 생활이 너무 고립된 섬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또 반대로 이 곳이 섬 같은 곳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경험하지 못할 기회들이 찾아오기도 하는데, 이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바느질 수업을 준비하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수업을 맡겠다고 했을때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엄청난 복병이 매복해 있었다. 그것도 세가지나 되는 복병이.

첫째, 바느질 관련 독일어 단어들을 내가 모르고 살았다는 점이었다.  

독일 사람들을 가르쳐야 하는데, 보통의 독일 사람들도 바느질과 관련된 단어들은 잘 모른다는 게 문제였고… 내가 가지고 있는 사전에서도 바느질 관련 단어들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저렇게 구글링을 해서, 어렵사리 알아내야 했는데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었다. (한 16년쯤 전에 독일에서 바느질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배우면서 메모 좀 해 둘 걸 ㅜㅜ ) 어쨌든 한고개는 넘었다.

두번째 복병 역시 독일어와 관련된 것으로, 독일어가 짧으니 차라리 설명서를 만들어서 나눠줘야겠다는 나름 현명한 방법을 생각해 냈지만, 설명서 만드는 일이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는점이다.  

어떤 행위를 글로 설명한다는 것은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닌 것이, 내가 바느질을 할 때 하는 행동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뤄지는데, 이걸 하나 하나 의식하며 글로 적으려니 너무 길어지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무한정으로 길게 쓸 수 없으니 줄여야하는데, 무언가를 늘이는 것보다 줄이는 데에 뇌의  에너지가 더 소요된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암튼 구글 번역과 아들의 도움으로 설명서는 어찌 어찌 만들었다. 두번째 고개도 겨우 넘고…

마지막 복병은 조금 슬픈 내용인데, 바로 나의 뇌의 노화였다. 

앞서도 적었듯이 독일어로 수업하는 게 너무 스트레스인지라, 강의 내용을 구글 번역기를 돌려가며 미리 독일어로 다 적어두고 외우려고 했는데, 수업 전날 텍스트를 외우려고 부단히 노력한 결과, 현재의 내 머리는 이 텍스트들을 담을 만한 그릇이 못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번째 고개는 아쉽지만 그렇게 넘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수업을 시작하며 참여하신 분들께 양해를 구하고 내가 적어간 텍스트를 보고 읽으며 수업을 진행했다.(마음 넓은 참여자 분들께 감사^^) 수업 중반 이후에는 그냥 “제가 하는 방법 보여드릴께요” 라고 하면서 말없이 보여주는 기술을 활용했다. 수업 며칠 전에 나랑 만나서 미리 보자기 만드는 방법을 배워둔 독일인 인턴사원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정말 식은땀으로 목욕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렇듯 복병이 숨어있긴 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아주 재밌는 경험이었다. 수강생들이 인구통계학적으로 아주 흥미로운 조합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 말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데다가 독일인 한국인 외에도 다양한 국적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함께 했다. 바느질 수업에는 여성들만 참여할 것이다 라는 나의 편견도 확실히 무너졌는데, 꽤 많은 퍼센트의 아저씨들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문화원 행사에는 내가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는 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 광경을 보니 참으로 내가 넓게 살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한국만, 독일에서는 독일과 한국만 생각하고 살았는데, 독일에 사는 다른 국적의 사람들도 많이 찾아오는 걸 보니, 나는 왜 다른 나라 문화원에 가서 그 나라 문화를 체험할 생각을 한번도 안해봤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수업 중 수강생들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들은 바에 따르면 많은 이들이 케이팝을 시작으로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갖는 수순을 따르는 것 같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여성분이랑 (20대일지도 모르겠다) 20대로 보이는 여성 두 분이 대화를 나누는 데, 케이팝 그룹들의 이름이 계속 오갔다. 그 중한 분이 말하기를, 자기는 케이팝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맥도날드에서 BTS 메뉴를 파는걸 보고, BTS가 누굴까 궁금해서 찾아보다가, BTS의 팬이 되고 한국문화의 팬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얘기 듣고 있으면 국뽕이 절로 차오르면서, BTS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건 그렇고, 그래서 수업은 성과가 있었나? 솔직히 말하면, 전체 32명의 수강생 중 컵받침을 완성한 사람은 단 2명이었다. 그 점은 아쉽다. 우리나라의 전통 감침질은 손이 많이 가는 바느질이다. 그래서 작은 소품이라도 하나를 완성하려면 긴 시간의 집중이 필요하다. 집에서 다들 완성 하셨길 바란다. 크리스마스 때 친구에게 선물할 거라고 하신 분! 꼭 완성하셔서 친구분께 뜻깊은 선물 하시길 바래요!!!

불발된 이야기의 시작

며칠 전 이었다. 추위에 어깨를 움추리고 주택가 골목길을 종종종 걷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걸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멈추어 서서 주변을 자세히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특이한 게 있었다. 얼른 핸드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었다. 한 장. 두 장. 세장.

보통 가로수들은 지나다니는 차나 보행자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아야 한다. 가지가 위로 높이 솟는 건 상관없지만, 옆으로 퍼지는 건 문제가 있어서 그런지, 내가 알고 있는 가로수들은 나무 기둥을 기준으로 최대 45도 각도로 해서 가지들이 위로 가지런히 올라가는 게 대부분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그 날 내가 본 가로수 세 그루는 각각의 가지들이 트위스트를 추고 있었다. 꼬불 꼬불 왔다 갔다 하며 춤을 추었다. 도시의 가로수 느낌이 아니라 전설의 숲 속 나무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규칙적인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렇게 카오스적인 데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낀다. 나무들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옛 이야기들처럼 나무가 돌아다닐 수 있다면, 걸어 다니는 나무들은 아마도 이런 카오스적 형태를 하고 있을 것이다.

더 희한했던 건 주변의 나무들은 모두 가지런하여 아무 일 없는 듯이 평온한 데, 유독 연달아 서 있는 세 그루의 나무만 요동을 치고 있는 점이었다. 이 나무들 밑에서 필시 무언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 생각은, 그리하여 주택가 골목길 지하로 깊숙히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에 오래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얼른 집에 돌아가야 하니까. 밖이 춥기도 하고…

내가 작가였다면, 여기에서 재미난 이야기가 시작 되었을텐데, 하고 아쉬워하며 다시 길을 걸었다.

(원고지 4.9장)

오늘은 공치지 않았다.

오늘은 공치지 않았다.
과거를 돌아보자면 새해 시작부터 아무 일도 못하고 공친 경우가 많았다. 작년만해도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보냈었다. 31일과 1일 사이에는 늘 분주하고 번잡하고 재미난 행사나 모임이 있어 정작 새해는 에너지 고갈 상태로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올해 1월 1일은 100일 글쓰기의 첫날이라는 중요한 의미가 부여되어, 미리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31일에 절대 오바하지 말 것. 그 결과로 1월 1일 아침에 이렇게 조용히 소파에 앉아 커피 한 잔 마시며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오바하지는 않았지만, 할 거는 다했다. 
새해를 함께 맞으러 동네친구도 놀러왔고, 떡국도 한 그릇 미리 끓여먹었고, 2019년 0시 0분에 나와 남편과 아들과 친구는 다 같이 집밖으로 나가 폭죽도 터뜨렸고, 축하 샴페인도 마셨다. (아들도 한 잔 주려고 무알콜 샴페인으로^^) 

2019년은 시작이 좋다. 1월 2일부터가 아니고, 1월 1일부터 한 해를 시작할 수 있어서. 

이 글을 쓰다보니 2019년의 모토를 “오바하지 말 것”으로 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 멋진 말로 포장해 보자면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나 할까. 과유불급이라… 과유불급…이 말에 걸맞게 오늘은 그만 써야겠다.^^

(원고지 3.6장)

나의 사랑하는 산책로

저는 출퇴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라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냅니다.
그렇다고 별도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라 운동량이 어마 어마하게 적죠.
그래서 결심한 바가 산책입니다.
주 5회 이상은 한 시간 이상 산책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특별한 산책로를 다니는 건 아니고, 동네 주택가 골목을 이 골목 저 골목 다닙니다.

오늘 낮에 “발상”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어요. 거기에 보면 영감의 원천의 하나로서 걷기와 산책을 추천하고 있더군요.
니체와 한트케, 구스타르 말러, 칸트 그 외 수많은 예술가와 사상가 들이 걷기를 통해 영감을 얻은 예들이 나옵니다.

“움직이면서 생각하기. 이것은 수많은 예술가와 사상가를 통해 확인된 아주 오래된 방법이다.
(중략)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매일 점심식사 후에 항상 산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수첩과 지휘봉을 들고 아내와 함께 산책을 했다.”

읽다가 이 부분에 꽂혔는데요, 그 이유는 너무 단순합니다.
제가 즐겨가는 산책 코스 중에 길 이름이 쿠스타프 말러 플라츠 라는 곳이 있거든요.^^

주택가 골목길을 굽이굽이 걷다가 보면 갑자기 넓게 화악~ 펼쳐지는 초록의 전경.
집에서 좀 많이 걸어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갑작스럽게 초록 세상에 입장하는 순간이 일종의 마법같아서 그 재미에 종종 갑니다.

이곳이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인 말러와 특별히 연관된 장소는 아닐 거 같아요.
거리 이름이나 광장이름에 유명인사의 이름을 워낙 많이 갖다가 붙이니까, 여기도 그냥 유명 작곡가의 이름을 붙인거겠죠.
그래도 반갑네요.

이 곳을 산책할 때 마다 말러가 산책을 하면서 곡의 영감을 받은 것처럼, 나도 무언가 영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생기고요.^^

태고적 기억, 블루 스카이

하늘이 파랬습니다. 구름도 없이.
산책길에 올려다 본 하늘의 색이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어 보았어요.
파랗긴 하지만 그렇게 강렬하게 파랗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은은한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파란색은 보통 차가운 색으로 분류되지만, 이런 하늘은 차갑다기 보다는 오히려 따뜻한 느낌을 주네요.
왠지 머나 먼 옛 기억을 소환하는 기분이랄까요.
아마도 우리의 먼먼 조상이 아프리카의 사바나 초원에서 살 때 늘 바라보던 것이 넓게 펼쳐진 초원의 초록색과 하늘의 파란색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태고적 원형을 바라볼 때 얻는 안정감이랄까.
우리가 초원의 초록과 하늘의 파랑에 정서적 반응을 보이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파랗기만 한 하늘을 보니, 온통 파란색인 이브 클라인의 작품, IKB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을 봤을 때 느꼈던 충격이 떠오릅니다.
그 작품을 봤을 때 느낀 강렬한 정서에 대비해서 오늘의 하늘은 평온한 정서를 불러 일으킵니다.
다른 날은 또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오늘만큼은 클라인 블루보다 오늘 바라본 스카이 블루가 훨씬 더 좋네요.

(* 이 글은 4월 29일에 쓴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