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물이 좋습니다

나는 물이 좋습니다.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습니다. 바다도 좋고, 호수도 좋고, 산 속에 흐르는 계곡도 좋습니다.
물에 가도 수영을 못하기 때문에 그저 눈으로 보기만 하거나 발만 담갔다가 오는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물들은 내 몸의 물들을 끌어당기는 힘을 발휘합니다.

물을 좋아하다보니 제가 좋아하는 경구들도 물에 관한 것이 많아요.
예를 들면 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또는 논어에 나오는 지자요수(知者樂水),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
뜬금없긴 하지만, 제 의사를 관철시키고자 할 때는 배수지진(背水之陣), 바다나 강을 등지고 진을 치다. 즉, 목숨 걸고 싸운다.
마음의 동요가 심할 때는 명경지수(明鏡止水), 즉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 그런 상태를 상상하며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위 사진은 작년 봄 밤베르크라는 도시에서 찍어 온 사진이예요.
도시가 강가에 집들이 면해 있어 분위기도 좋고, 그날은 햇살까지 좋아 강에 반사되는 햇빛이 어찌나 반짝거리던지…. 현실판 동화나라 같았습니다.
청둥오리 가족들도 한가로이 물 위를 떠다니고요.
바로 이런 게 살면서 잠시나마 느낄 수 있는 행복감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것.
나른함이 밀려오고 한참을 바라다보면 졸음까지 오는 상태.
고요한 물도 이리 좋습니다.

작년 초봄에는 칭스트라고 하는 바닷가 도시에 다녀왔지요.
그날은 봄이라고 하기에는 몹시 춥고 바람이 광포하게 불던 날이어서, 큰 맘 먹고 타려던 잠수정도 운행을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바다 바람 때문에 숨 쉴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몸 속으로 훅~ 들어오면, 갑자기 정신이 각성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파도의 소리.
청년의 호연지기를 깨운다는 바로 그 소리.
중년의 저에게도 자그마하게 남아있는 그 기운을 북돋아 주는 소리가 됩니다.
크게 소리내며 움직이는 물도 이리 좋습니다.

아, 그 날들을 머리 속으로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좋네요.

복불복 내 인생

인생이란 참으로 예측불가하다.
내가 사는 내 인생인데,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내 삶에 깊숙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것 부터가 내 의지와는 상관이 없으니 실로 그러하다.

길을 가다가 보도 블록 틈 사이에 자라나고 있는 작은 식물을 보았다.
식물의 이름은 모르겠다.
다년생인지, 일년생인지, 관목이라고 해야 할지, 분재 같은 작은 나무라고 해야 할지.
마치 나무에서 잘린 가지 끝부분이 블록 사이에 박혀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누가 거기에 일부러 심은 게 아니라면, 필시 말도 못하게 힘든 과정을 거쳐 자란 상태였을 것이다.
흙도 거의 없는 시멘트 블록 사이.
이렇게도 열악한 환경에 뿌려진 씨앗으로부터 이 식물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본능적 욕구에만충실하게 반응하며 힘들게 힘들게 자라났을 것이다.
생존 본능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다시 한번 절절하게 느꼈다. 생명은 진실로 위대하구나.

그러나 다음 순간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이렇듯 힘들게 자라났으니 앞으로의 삶이 순탄하다면 다행이련만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보도 블록 사이 자라난 식물에게 주어진 앞으로의 삶이란 건 과연 어떤 삶일까? 호락호락한 삶은 아닐 것이었다.

힘든 일이 지나가면 좋은 일이 온다고들 한다.
진짜 그럴까?

한번 생각해 보자.
동전 던지기를 했는데, 4번 연속으로 뒷면이 나왔다고 치자.
그리고 5번째에는 앞면이 나오길 고대하고 있다고 치자.
자, 그렇다면 번에는 앞면이 나올까? 뒷면이 나올까?
4번이나 뒷면이 나왔으니 이번엔 앞면을 기대해도 될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은 던질 때 마다 언제나 동일하게 50%이다.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 보면, 자꾸 뒷면만 나오는 것이 이 동전이 불량동전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되려 다음번에도 뒷면이 나올 확률이 더 높은 게 아닐까 의심할 법도 하다.

´고진감래´니 ´호사다마´니 하며 우리는 계속 좋은 일이 생기면 왠지 이젠 나쁜 일이 생길 거 같다거나, 나쁜 일이 이어져도 언젠가는 좋은 일이 생길 거라 믿는다.
하지만 이전의 상황이 누적되는 경우라면, 실제 우리 삶에서는 나쁜 일에 나쁜 일이 올 확률은 더 높아지고, 좋은 일엔 좋은 일이 따라 올 확률이 높다.
이전 상황이 누적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가 어찌해 볼 수 없이 외부로부터 오는 나쁜 일 또는 좋은 일은 확률상 같은 비율로 나에게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냥 좋다고 방심하면서 살 수도 없고, 지금 힘드니 내일은 좋아지리라 기대만 하고 살 수도 없다.
남들 보다 좋은 삶 혹은 남들 보다 힘든 삶 모두는 우연의 결과일 수도 있다.
결국 삶은 복불복이며 그래서 불안한 것이다.

예측 할 수 없는 삶.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일은 어찌 해보겠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은 적응하며 사는 수 밖에.

길거리에서 본 식물 때문에 인생의 회의주의자가 된 것인가?
하지만 내일 눈부시게 아름다운 뭔가를 발견하게 된다면, 내일은 다시 인생의 낙관주의자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 이 글은 4년 전 일기장에 써 놓은 글을 수정하여 올린 것임.

기억에 모이스처라이징

블로그 업데이트가 원활히 되지 않고 있는 느낌이다.
주 3회 정도는 업데이트 하려고 했는데, 의지가 점점 사그라들려고 한다. 안돼!!!

블로그에 올리지는 않지만, 4월에도 글쓰기는 계속하고 있다.
지극히 사적인 에세이를 쓰는 과정이라 공개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대부분은 오픈하지 못하고 있을 뿐. ㅠㅠ
공개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마음도 곧 극복해야 하리라.

아무튼 사적인 이야기들을 마구마구 쓰면서 알게된 사실이 있다.
내가 과거에 대한 기억을 많이 떠올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슬프거나 좋았거나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되는 장면들이 많지 않다.
힘든 기억도 다 견딜만한 일이었고, 아주 슬픈일도 없었고…
환희에 가득찬 적은 있었던가?

내 생각의 대부분은 현재에 머무는 것 같다. 일부분은 가까운 미래 계획에 두고.
과거가 쭉 이어져 오늘의 내가 되었을텐데, 그 기억들 대부분은 어디로 갔을까?

에세이 주제에 따라 나의 과거를 소환해야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때면 난감한 기분이 든다.
어떤 일이 있었나? 고민고민하면서 글을 써 놓고 보면 너무 건조하다. 옛 기억 치고는 너무 건조해.
기억에 모이스처라이징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나도 촉촉한 기억을 갖고 싶다.
그래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명장면, 홍차에 그 유명한 마들렌을 찍어먹으며 자신의 과거로 소환되는 바로 그 장면처럼 아름다우면서도 감성을 터치하는 글을 쓸 수 있을텐데…

사막의 모래가 바람에 일듯 기억의 표면만 들썩이다 말기 일쑤다.
비가 쫙쫙 내려서 땅 깊숙이 물이 스며들듯이 기억의 깊은 곳, 당시 내가 느낀 감정들까지 표현할 수 있다면….

이렇게 쓰고 보니, 나는 원래 나는 사막같은 사람일수도 있으니 이걸 특화시켜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사막에도 오아시스는 필요하다. 역시 촉촉한 게 좋겠다.

튜울립이 활짝 피었다.

튜울립이 활짝 피었다. 피어도 피어도 너무 피었다. 몽오리 진 꽃다발일 때는 그리도 예쁘더니 활짝 펴서 고개까지 살짝 숙인 튜울립 다발은 탁자위에 계속 둘 것인가 치울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꽃의 형태는 몰라도 꽃잎의 색은 여전히 붉은 게 아직은 그 아름다움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당분간은 그냥 두기로 하였다.

꽃의 입장에서는 만개하는 게 너무 당연한 건데, 활짝 피었다고 타박하는 내가 우습긴 했다. 하기는 내가 식물이나 꽃에 대해서는 진짜로 아는 바가 없는 사람이긴 하다. 그나마 이 꽃이 튜울립인지 아는 정도이다.
꽃이라고 하면 꽃이름이나 꽃향기, 꽃말 같은 아름다운 것들 보다는 꽃잎이 피보나치 수열을 이룬다는 것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피보나치 수열을 떠 올리니 갑자기 궁금해졌다. 튜울립은 잎이 몇 개던가? 3개? 5개? 아니면 8개? 태어나서 처음으로 꽃잎의 개수를 세어 보았다. 하지만 튜울립의 꽃잎 개수는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피보나치 수열에 없는 6개였다. 급하게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튜울립은 예외라고 했다. 왜냐하면 실상은 6개 중 3개만 꽃잎이고 나머지 세 개는 꽃받침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알고자하니 모든 것이 신기했다. 꽃이라는 존재가. 그동안 너무나 무심했던 것에 대해 반성하는 의미로 만개한 꽃 속을 들여다 보았다.

그런데 이건 몽오리 진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별세상이 아닌가?
부드러운 꽃잎 안에 견고한 땅콩같은 게 삼발이 모양으로 중앙에 꽂혀있었다(이것도 검색해 보니 꽃의 암술이라고 했다). 그 주위로는 짙은 초콜렛 색의 병 닦는 긴 솔 같은데 둘러져 있었다(이것은 수술이었다). 붉은 색과 초콜렛 색 사이는 화선지 물 먹은 듯 색 퍼짐이 예술적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꽃의 화가라고 불리는 조지아 오키프가 왜 그렇게 꽃을 사랑해서 왜 그렇게 꽃 그림을 많이도 그렸는지, 그 심정을 100분의 1 쯤은 이해할 것 같았다. 오키프의 꽃들은 진짜 꽃의 몇 십배의 크기로 확대되어서 추상화 같은 느낌을 준다. 나한테는 튜율립의 꽃 속도 그랬다. 현실적이지 않고 몽환적이며 선명하지 않고 흐릿한 느낌이 낮에 꾸는 꿈 같았다.

몽오리 진 꽃들은 측면에서만 바라 볼 때가 많았다. 물론 그 모습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마치 벌이 꽃 안에 들어가서 꿀을 빨 듯, 꽃 속의 모습을 들여다 보니 내 눈에는 이 모습이 더 아름다워 보였다.

이 모습으로 벌과 나비 새들을 유혹했겠지.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 꽃의 아름다움은 결국 생존을 위한 것이었구나. 반면 생존을 위해 뭔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름다움이고.

만개한 꽃을 버릴까 말까하다가 생존의 문제에까지 다다르다니 너무 멀리 갔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생각의 끝은 결국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즉, 어떻게 살 것인가로 귀결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닐까.

생각들아, 꼼짝마라. 너희들은 포위되었다.

블로그를 하게 되면서 생긴 습관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어떤 글감이 떠오를때마다 아이패드 메모장에 간단히 내용을 적는다.
핵심 단어 몇 개 혹은 짧은 문장으로.
그리고 메모장에 있는 글감들을 이미 블로그의 글로 만들었다면, 그 내용을 지운다.
이렇게 하나 하나 쓰고, 하나 하나 지운다.

그러다가 어느날 글감을 새로 적은 날보다, 블로그에 글을 업데이트 한 날이 더 많아서, (혹은 메모장에 있는 글감들이 당장은 글로 만들어지기엔 구체화되지 않은 상태라서), 쓸 만한 글감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날이 온다. 오늘 같은 날.

그럴 땐 블로그 업데이트를 안 하면 아주 간단히 문제가 해결된다.
하지만 지금은 매일 블로그 글쓰기 과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난감한 상황을 반드시 극복해야만 한다.

그래서 생긴 두 번째 습관. 바로 옛날 일기장이나 수첩 다시 뒤지기이다.
거기서 가끔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난다.
오. 내가 이런 생각도 했었다니 하면서 감탄하기도 하고, 옛날과 생각이 좀 달라진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아래는 2014년에 아이패드 일기장 앱에 써 놓은 글.

“무언가 할 일이 없을 때 마침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두곤 했다.
(중략)
대부분이 허접스런 생각들이지만 그래도 어떤 것들은, 오… 내가 이런생각을 했었단말야? 하고 자뻑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뇌의 배신이란 책을 보니까 멍때리고 있을때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하더라.
하지만 계속 멍때리기만 하면 그 아이디어들도 그냥 날라가 버리겠지. ㅎㅎ
그렇지만 수첩에 재빠르게 적어두면 절대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생각들아, 꼼짝마라. 너희들은 포위되었다.
음….수첩을 아이디어포획자라고 부를까?”

누구 보라고 쓴 글이 아니라서 그냥 의식의 흐름 수준이다.
뭐,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알겠다.

생각은 잡아두지 않으면 다 날라간다. 생각을 포획해서 수첩에 적어라.

그 전에는 수첩에 적어라.가 마지막이었는데, 지금은 그걸 잘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려라.가 추가 되었다.

암튼…. 지금 현재 내 메모장엔 하나의 글로 만들어질 만한 글감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내일 쓸 글감을 마련하기 위해선 뭐든 재미난 일을 해야한다. 재미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