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건초더미와 칸딘스키의 추상미술
어제 책을 보다가 아주 흥미로운 부분을 읽게 되었다.
박혜성의 <어쨌든 미술은 재밌다>라는 책에 보면, 법률가였던 칸딘스키가 모네의 “건초더미”그림 한 점을 보고 화가로 전향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상파인 모네와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칸딘스키의 접합점은 어디일까.
참 생뚱맞은 조합이다.
작년에 포츠담에 있는 박물관 Museum Barberni 에서 인상주의 전시회가 있었다.
내가 참여하는 모임 중에는 정기적으로 하다가 지금은 비정기적으로 하고 있는 박물관 수업이 있는데, 수업을 듣는 회원들도 그 전시회를 방문했었다.
그 때 선생님이 강조하여 말씀하시길,
모네의 “건초더미” 연작을 이렇게 많이 모아놓은 전시회는 없었다. 한 번에 모네의 건초더미를 이렇게 많이 볼 수 있는 기회는 아마도 다시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회가 의미가 있다. 고 하셨다.
아마도 이 박물관이 새로 개관을 하면서, 박물관 측에서 작품을 여기저기서 가져오는 데 힘을 좀 쓴 모양이었다. 다른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대여한 것도 많았지만 개인소장품들도 많았다.
아무튼… 모네라고 하면 수련 연작이나 알지, 건초더미 연작은 처음 들었고, 또 처음 보았다.
박물관 한 곳에 마네의 건초더미들이 연달아 걸려있었다. 전체 몇 작품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어쨌건 다 건초더미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에 맞춰.
(그날 사진을 하나도 안 찍었는지 사진이 사진첩에 하나도 없다.ㅜㅜ
그래서 브러셔에 있는 사진을 다시 찍어보았다. 더 많은 이미지가 궁금하신 분은 google에서 모네 건초더미를 검색하시면 된다.)
이 작품에서 칸딘스키는 어떠한 예술적 부름을 받았던 것일까?
사실 칸딘스키는 이 그림이 건초더미를 그린 것인 줄 몰랐었다고 한다.
건초더미라고 생각을 안 하고 보면, 내가 봐도 그냥 어떤 덩어리가 화면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저 의미 없는 모양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는 일종의 에피파니(갑작스런 깨달음이랄까)를 느낀 것 같다.
나중에서야 그림의 제목을 보고 분노와 충격을 동시에 느꼈다고.
“이 때 칸딘스티의 마음에 추상미술의 씨앗이 심어집니다. ‘그림은 대상이 보이지 않아도 감동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위의 책 인용)
지금이야 “대상이 보이지 않아도 감동할 수 있다”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추상미술이란 것 자체가 없었던 그 시기에는 매우 놀라운 깨달음이었을 것이다.
결국, 누가 시작했건 추상미술은 시작되었겠지만, 칸딘스키에 의해 추상미술이 시작된 것은 모네 그림의 오독에서 시작되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나는 이런 점이 너무 좋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확실하고 명확하다면, 새로운 것이 나타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잘못 든 길이 새로운 길을 만드는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