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은 진심은 전해지지 않는다 – 카렐 차페크의 “호르두발”을 읽고
줄거리만 본다면 전형적인 막장 드라마이다.
돈 벌러 외국에 나갔던 남편이 8년 만에 돌아온다. 그러나 그는 아내와 딸로부터 환영받지 못한다. 아내는 그 사이 그 집 머슴과 내연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은 그 사실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철저한 외로움 속에 지내게 된다…. 등등.
그는 선량한 희생자인가?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그의 절절한 외로움을 함께 느끼다보면 그의 심적 고통을 독자들도 거의 동일하게 느낄 수 밖 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묻는다. 그는 선한 사람이긴 하지만 과연 옳은 사람이었는가?
그는 외국에 나가 있던 8년 중 5년 동안 아내에게 소식 한번 전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아내는 다른 사랑을 찾았다.
그는 외롭지만 다른 이들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그의 대화는 거의 대부분 그의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는 생각한다.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건다면 이렇게 말할 텐데, 하고.
그는 밭에서 농사를 짓고 소와 돼지를 키우고 싶지만, 아내는 평지를 사서 말을 키우고 싶어 한다. 그는 아내 말을 따르지만, 농사를 짓고 살지 못하는 아쉬움을 혼자 삭힌다.
그는 아내에게 밭농사를 짓고 싶다고, 소와 돼지를 기르고 싶다고 주장하였던가? 아니다. 그는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자기 표현을 잃었다는 점이 그의 외로움 보다 더 슬펐다. 말하지 않는 진심이 외로움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메리카로 돈 벌러 떠나기 전에는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었을까? 외국생활 중 영어라고는 ‘헬로 호르두발’만 알아듣고 달려가야 했던 그는 결국 자신의 말을 잃을 수 밖에 없었던가?
말이라는 것은 결국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두 사람의 언어가 다를 경우, 의사를 전달하고 받기 위해서는 둘 다 노력해야 하지만 외국인 노동자였던 그는 무조건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그것이 그의 입을 닫았고, 그는 계속 혼자서 대화를 했겠지. 그의 머릿속 대화는 결코 독백이 아니었다. 그는 상대방의 역할과 자신의 역할을 동시에 하면서 대화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는 말을 하였으나 결코 상대방에 가 닿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비극이었다.
그에게는 선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선의는 말해지지 않았고, 전해지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그의 선의가 전달되지 못한데 있었으며, 그의 심장에 담겨있던 그의 선의는 사라지고 말았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이러한 비극적 정서를 더 두드러지게 만든다.
“유라이 호르두발의 심장은 어딘가에서 분실되었고 영원히 매장되지 않았다.”
가련한 호르두발!
말하지 않은 진심은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위 사진은 카렐 차페크 묘지.
2016년 4월 체코 프라하 근교 비셰흐라트 국립묘지 방문시 찍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