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감상문

나는 왜 쓰려는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조지 오웰은 글쓰기의 동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네 가지 동기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순전한 이기심.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를 말한다.

2. 미학적 열정.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3. 역사적 충동.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전해 두려는 욕구를 말한다.

4. 정치적 목적.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

조지 오웰은 본인이 천성적으로 앞의 세 가지 동기가 네 번째 동기를 능가하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살았던 삶의 배경 때문에 정치적 글을 쓸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전체주의에 맞서고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글들을 썼죠. 그러나 그는 그저 정치적인 글 말고,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들고 싶었다고 합니다.

 

몇 년 전부터 심하게 글쓰기 충동이 일었을 때, 물론 저에게도 이기적인 동기가 가장 컸습니다. 이름 석자를 알리고 싶은 욕구였죠. 아마도 그 다음 동기는 정치적 목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정확히 말해서 사회적 목적이라고 하는 게 좋겠죠.

그 동안 제가 여기저기 올린 독서목록을 자세히 보신 분들은 알 수도 있겠지만 최근 몇 년 저의 최대 관심사는 여성주의였습니다. (그 다음은 종교입니다.)

글을 쓴다면 여성주의에 대한 글을 쓰고, 읽은 이들이 여성주의의 중요성을 함께 인식하기를 바랬죠. 하지만 아직 이론적 내공도 일천하고, 현 상태에 대한 확실한 분석도 없는 상태에서 아무것도 아닌 여성이 뭔가를 쓴다는 것에 두려움이 많았어요. 자체 검열이 심했죠.

지금도 그렇습니다.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인터뷰집에서 읽은, 움베르크 에코의 말이 떠오르네요.

“우리가 이론화할 수 없는 것은 이야기해야한다.”

.나는 전문적으로 그 분야를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아직 아무것도 이론화할 수 없는 상태고, 결국 내가 이것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에 대한 의문이 항상 듭니다.

그 때마다 이 문구를 떠올립니다. 이론화 할 수 없다면 이야기로 전해야지.

이론화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로 쓴 예가 바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고 “1984”가 아닐까요?

지금 조지 오웰의 산문집인 “나는 왜 쓰는가”를 읽고 있는데, 이 글들 역시 예술적인 정치글들 입니다.

그를 따라 오늘 글의 제목을 “나는 왜 쓰려는가”로 달아보았습니다. 아직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하기엔 너무 민망한 단계라, 쓰는가가 아니라 쓰려는가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나는 왜 쓰려는가?

일단 이름 석자를 알리고픈, 뭔가 있어보이고 싶은 마음을 감출 생각은 없습니다. 다음은 예술적 글쓰기를 할 역량이 되면 사회적 글쓰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론화할 여력이 없다면, 아마도 이야기를 쓰게 되겠지요.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을 때 까지는 안타깝지만, 계속 자체 검열을 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읽히려면 우선적으로 아름다운 글이어야 하니까요.

이제 1학년 입학했다 생각하고 열심히 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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