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감상문

사랑 대신 삶을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을 읽고 (Feat. 우엘벡 “소립자”)

 

사랑은 일종의 게임이다. 게임의 규칙은 이렇다. A는 B와 C를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동시에 사랑할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반칙으로 여겨진다). 반면 B와 C는 동시에 A를 사랑할 수 있다. 이러한 불균형 때문에 사랑의 승자와 패자가 가려진다. 게임은 영원히 계속되고, 승자와 패자는 계속 바뀐다.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은 이런 사랑게임에 관한 이야기이다.

장례식에 두 여자가 있다. 결국 한 여자만 미망인의 칭호를 얻는다.

전쟁 후 돌아온 남편에게 옆집 여자가 친절하게 굴자, 남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엄마의 행동이 변한다. (남자의 수가 적으니 여자가 약자가 된다)

유명해진 극작가는 배우를 버리고 무용수를 선택한다.

한 여자는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기미에 순순히 게임을 포기하고 그를 보내준다. 등등.

우리의 주인공 ‘나’는 중년의 여성이다. 어느 날 급작스런 마비와 발작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회복되고, 그 사건으로 사랑을 삶의 절대 가치로 삼는다. 그 후 ‘나’는 프란츠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나’는 이미 남편과 딸과 8마리의 거북이들을 떠나보냈는데, 그는 반칙을 하면서 그녀와 자기 부인 사이를 오가기 때문에 ‘나는 그의 부인과 게임을 해야만 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외친다. “그대를 차지하거나 죽는 것”이라고(어느 희곡의 대사이다). 사랑의 승자가 되거나 아니면 죽어버릴 것이라고. 프란츠가 부인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떠나자 ‘나’의 망상과 집착은 극에 달한다. 어느 날 프란츠는 ‘나’를 떠난다(아니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그를 차지하지 못하였지만 ‘나’의 외침대로 죽지는 않는다. 떠나간 사랑의 허상을 만들어 놓고(프란츠라는 이름도 사실은 그녀가 새로 붙인 이름이다. 실제 그의 이름은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와 함께한 기억으로 40년인지 50년이지 모를 긴긴 삶을 산다. 결국 ‘나’에게 삶의 의미는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삶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죽음 대신 기나긴 삶을 유지하기 위해 사랑의 허상까지 만든 것을 보면. ‘사랑 아니면 죽음’이라는 외침은 단지 게임의 승리를 기원하는 구호일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나는 우엘벡의 소설 “소립자”가 떠오른다.

자신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우선시 하는 어머니 덕에 두 아들 부뤼노와 미셀은 버림받고 사랑으로부터 배제된다. 어머니가 사랑을 찾았기 때문에 자식들은 사랑을 잃었다.

브뤼노는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랑은 젊고 매력적인 사람들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그는 늘 변두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반면 미셀은 사랑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 학문에만 매진한다. 그는 모두 사랑을 찾지만 사랑 때문에 공격적이 되고 슬픔을 가질 수 밖에 없는 현 인류의 상황에 절망하여, 현 인류의 멸종과 신인류의 창조를 제안하고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의 제안이 세상에 받아들여지고 신인류가 만들어진다. 무성생식으로 자가복제를 하여 이기주의와 잔혹함과 분노에서 벗어난 인류 말이다. 그리고 현 인류는 서서히 멸종의 길을 간다.

평단에서는 우엘벡을 ‘성적인 프롤레타리아들의 예언자’라고 한단다(동감한다). 돈을 많이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로 계급이 나뉘듯, 사랑을 많이 받는 자와 받지 못하는 자 사이에도 사회적 계급이 생긴다 . 이렇듯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갈 수 없는 것을 가장 큰 삶의 가치로 여기고, 여기서도 사랑 저기서도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외치는 것이 정당한 것일까?

사랑을 잃은 자들이여,

사랑 때문에 분노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그렇다고 죽지도 말고

그저 나의 살던 삶을 살자.

사랑은 그렇게 고귀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P.S) 오늘 쓴 글은 아니고, 전에 써 둔 글이예요.

주간 목표인 나흘 업데이트 이미 달성한 기념 및 주말 맞이 기념으로, 전에 써 놓고 컴퓨터에 모셔놨던 거 올려봅니다. ^^

좋은 주말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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