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쓰는 것이 아니라 붙잡는 것
아들 책장을 뒤져서 먼지 쌓인 에리히 케스트너의 책 ‘에밀과 탐정들’을 찾아냈다.
며칠 전에 다카하시 켄이치로가 쓴 ‘연필로 고래잡는 글쓰기’라는 책을 읽었는데, 책 중간에 ‘에밀과 탐정들’ 서문을 길게 인용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밀과 탐정들’이라면 옛날에도 재밌게 읽었지만, 다 큰 어른이 되어서 다시 독일어 책으로 읽은 적이 있었다. 그 때도 서문을 인상 깊게 읽었다. 그것은 소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메타 이야기이었다. 어쩌면 실화일 수도 있겠지만….
암튼 서문이라도 다시 읽어보려고 찾아낸 에밀과 탐정들. 반갑다.
소설은 머리를 쥐어짠다고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에밀과 탐정들의 저자는 원래 남태평양의 한 섬에 사는 소녀가 미국에 가는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그러다가 고래가 출몰하는 부분에서 고래다리가 몇 개인지 모른다는 사실에 좌초된다. 식당 웨이터는 그에게 남태평양에는 가 봤느냐고 물으며, 아는 것에 대해 쓰라고 조언한다. 낙심한 그는 방바닥에 누워 방 안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아주 새로운 시각으로 말이다. 늘 위에서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바닥에서 올려다보게 된 것이다. 그러자 탁자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탁자 다리를 본 순간 밤색 양말을 신은 아이가 떠오르고… 그래서 에밀이라는 소년이 탄생한다. 그리고 에밀에게는 티쉬바인(탁자다리)이라는 성이 붙게 된다. 에밀 티쉬바인. 이렇게 해서 에밀과 탐정들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연필로 고래잡는 글쓰기’의 저자는 이 에밀 이야기를 장황하게 인용하면서, 소설은 쓰는 것이 아니라 붙잡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에리히 케스트너가 탁자다리를 잡은 것처럼 말이다. 먼저 다른 소설들을 자기만의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놀다가, 거장의 소설을 아이처럼 흉내 내고, 다가오는 이야기들을 조심스레 붙잡아 쓰라는 것.
아주 새로운 관점의 소설작법 책이었는데, 엄밀히 말하면 소설을 사랑하는 법에 관한 책이기도 했다. 저자는 마지막에 흉내 내기 좋은 일본 작가의 작품들을 부록으로 실었는데, 그 리스트의 처음이 다자이 오사무의 전작이다. 어제 ‘에밀과 탐정들’을 찾아내었듯,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도 다시 찾아 읽어봐야겠다.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런 종류의 책은 참 고맙다. 옛 기억도 살려주고, 새로운 시각, 새로운 정보도 주고 말이다.
(원고지 6.6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