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 예술 산책


지난 주말엔 친구 P와 함께 <48 Stunden Neukölln> 행사에 갔다. 이 행사는 매년 6월의 어느 주말, 베를린 노이쾰른에서 열리는 예술 축제로, 작가 아뜰리에, 카페, 식당, 공공기관 등 300여 개가 넘는 장소에서 48시간 동안 각종 예술 작품들이 전시된다. 친구 P의 지인이 예술가인데, 그분의 아뜰리에가 이번 행사에 참여한다고 해서 겸사겸사 찾아가게 되었다.
친구 지인의 아뜰리에는 세 명의 예술가가 함께 작업하는 공간이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아뜰리에를 마치 비치 클럽처럼 꾸며두고, 슬러시 판매대를 만들어 찾아오는 관객들에게 샴페인이 든 슬러시를 나눠 주고 있었다. 입구 옆에 세운 가벽에는 각자의 소품 작업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판매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중 엽서 크기의 작은 꽃그림을 하나 구입했다. 슬러시 판매대 안쪽에는 각자의 작업 책상이 아무런 꾸밈없이 그대로 놓여 있었는데, 아뜰리에 특유의 현장감이 살아 있었고, 지금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아뜰리에서 나와 우리는 팸플릿 속 지도를 펼쳐 들고 또 다른 예술가들을 찾아 나섰다. 거리를 걷다 보면 ‘48 Stunden Neukölln‘의 플래그가 문위에 걸려있거나, 포스터가 창문에 붙은 곳들이 눈에 띄는데, 그런 곳이 바로 예술가들이 참여 중인 공간이다.
우리가 두 번째로 찾아간 장소는 작은 카페였다. 그곳에서는 한 작가가 관객들과 함께 명상 드로잉 Meditative Drawing을 하고 있었다. 카페 공간은 48시간 동안 작가의 아뜰리에로 변신한다. 물론 카페니까 음료도 판매한다. 관객들은 음료를 마시고 싶으면 사서 마시고, 전시를 감상하거나 드로잉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친구와 나도 자리를 잡고 앉아 함께 그림을 그렸다. 명상 드로잉은 손이 가는 대로 자유롭게 그리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작가가 인도하는 대로 동그라미, 직선, 곡선을 하얀 종이 위에 그린 뒤, 그 안에 자연스럽게 생긴 공간에 다양한 무늬를 채워 넣었다.
이후 우리는 골목골목을 다니며 포스터나 플래그가 걸린 곳을 찾아다녔다. 작가의 아뜰리에도 있었고, 카페, 갤러리, 빵집 등 일상의 공간들도 전시장으로 변해 있었다. 베를린은 역시나 명실상부 예술가들이 선망하는 예술의 도시 다웠다. 하지가 막 지난 터라 여름밤이 길었고, 비 온 뒤의 청량한 공기가 도시를 더욱 상쾌하게 만들었다. 7시쯤 도착해 돌아다니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시간이 10시 가까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곳만 더 보기로 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아뜰리에였는데, 길을 잘못 들어 이길 저길을 헤매며 돌아가야 했다. 행사 포스터가 붙은 집을 찾고 있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누군가가 “작품 보러 왔니?”하고 물었다. 고개를 돌리니, 히피처럼 보이는 세 명의 사람이 발코니 난간에 앉아 우리를 보고 있었다. 우리가 그렇다고 하자, 발코니로 올라오라고 손짓했다.
그 아뜰리에는 건물의 1층에 있었지만, 반 계단 정도 올라간 위치라 발코니로 들어가는 일이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두 단짜리 작은 의자가 있었고 그걸 밟고 올라선 뒤, 한쪽 다리를 힘껏 들어 올리고 난 후, 누군가가 손을 잡아당겨주어야만 간신히 난간을 넘을 수 있었다. 내 흰머리를 본 탓인지 그들은 정문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왠지 그 길을 택하고 싶지 않았다. 방문객들에게는 신발을 벗어달라고 했다. 우리는 신을 벗고 그 안에 들어갔다.
실내는 조명이 어두웠고. 작은 미러볼에서 반사된 빛이 약하게 번지고 있었다. 버려지고 더 이상 쓰지 않는 물건들로 만든 미니어처 우주가 천장에 모빌처럼 매달려 있었고, 골동품으로 채운 작은 방의 미니어처도 전시되어 있었다. 작가는 그것을 맨 눈으로 보지 말고 작은 망원경으로 보라고 권했다. 작은 망원경으로 보니 미니어처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커다랗게 보였고, 렌즈 가장자리가 흐릿하게 보이는 덕분에 오래된 영화를 보는 듯한 몽환적인 느낌이 들었다. 배경 음악도 그런 분위기를 더했다. 오래된 세계에서 흘러나올 법한 음악이었다. 천장에 매달린 우주를 보려면 바닥에 누워야 했는데, 가만히 누워있다 보니 중력을 잃고 우주에 붕 떠 있는 느낌이 드었다. 예전에 히피들이 약을 하고 이런 감각을 느꼈던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대로 한참 누워 있고 싶었지만, 방문객들이 점점 많아져 자리를 내주었다.
다른 방은 조명이 밝았지만, 마찬가지로 잡동사니로 만든 사람 형상의 오브제들이 천장에 매달려 있었고, 벽면에는 뭔가 빼곡히 적힌 종이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또 한 명의 작가는 방구석에 누운 듯이 앉아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쩐지 진짜 예술가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 옆에는 오래된 수동식 타자기가 있었는데, 친구 P는 그런 걸 처음 본다며 신기해했다. 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라떼”이야기를 꺼내, 나 어릴 때는 이런 타자기가 흔했다는 말을 해 주었다.
마지막에 방문한 아뜰리에가 인상 깊어서 길게 묘사해 보았다. 즐거운 밤이었다. 밤거리를 누비며 논 것도 오랜만이었다. 밤공기가 상쾌하고 좋구나, 새삼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이런 젊고, 가난하고, 예술적인 감각 때문에 내가 베를린을 못 떠나지,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명상 드로잉 체험할 때 그린 그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