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감상문

이반이 만난 악마와 도스또예프스키의 SF적 상상력

지난 연말에 한 달 동안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었습니다.

그 기간 내내 도스또예프스키에게 빠져서 허우적 허우적 대었는데, 오늘은 그 중 한 가지 얘기를 해 볼게요.

주인공은 막내아들인 알료사 이지만, 가장 매력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저는 단연코 둘째 아들인 이반을 선택할 것입니다. 이반은 공부도 많이 했고, 러시아 전통과는 대비되는 유럽식 사상을 받아들인 자이며, 철저한 무신론자이자 회의주의자입니다.

그는 무척이나 이성적인 인물이지만, 자기 사상이 타인에게 미친 영향으로 아버지가 죽게 되고, 형이 그 누명을 쓰게 된 죄책감에 의해 섬망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 와중에 악마와 마주하게 되지요. 저는 이 장면이 너무 너무 맘에 들어서 나중에 이 부분만 또 읽었답니다.

이 책에서 가장 명문으로 알려진 부분은, 이반이 알료사에게 전해주는 “대심문관”이야기입니다만, 이반과 악마가 대화하는 이 장면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할 만큼 극적입니다.

내용은 워낙에 심오해서 제가 이러고 저러고 할 만한 수준은 아니고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도스또예프스키의 상상력입니다.

이반을 찾아온 악마는 자기에 대한 이러 저러한 얘기를 하다가, 우주 공간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다 감기에 걸리게 된 사연을 얘기해 줍니다.

뻬쩨르부르크 귀부인이 연 파티에 급하게 가느라, 우주공간을 날아오게 되었는데, 연미복 앞섶이 열린 조끼 차림으로 태양광선으로도 8분이나 걸리는 거리를 영하 1백 50도의 온도에서 사람으로 변신한 상태로 오다가 그 매서운 추위 때문에 감기에 걸려버렸다고 하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지구에서 태양광선으로 8분 거리에 있는 곳은 태양 바로 그 곳 인데, 악마가 그곳에서 왔다는 의미일까요?

우리가 아는 바로 악마는 빛이 있는 곳 보다는 어둠이 지배하는 곳에 존재할 것만 같았는데, 게다가 하늘 위 우주가 아니라 지구 안 깊숙한 곳에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예요.

밝게 빛나는 태양이 악마가 사는 거처였을까요? 악마는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누구도 모르는 곳에 있었다고만 말하죠.

갑자기 소설의 내용이 러시아의 작은 마을에서 우주로 확~ 확장되어 버렸습니다.

덧붙여서 악마는 죽어서 1천조 킬로미터의 암흑 속을 걸어서 통과하라는 판결을 받은 사상가이자 철학가인 사람 이야기를 해 줍니다. 내세를 믿지 않았던 그는 거의 천년을 걷지 않고 버티다가, 마침내는 1천조 미터를 걸어 천국 문 앞에 이르게 되었는데 망설임도 없이 그 문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1천조 킬로미터를 걷는 데에는 10억년이 걸렸지만, 그가 천국 문을 통과 하는 데에는 2초밖에 걸리지 않았죠. 그는 <호산나>를 불러댔고, 극단적 보수주의자로 변해버렸다는 이야기랍니다.

이반은 도대체 어디서 10억년을 가져 온 거냐고 묻고, 악마는 대답합니다.

 

“자네는 현재의 우리 지구만을 생각하고 있군! 현재의 지구도 일정시간이 지나면 얼어붙고 갈라지고 부서지고 구성 분자로 분해되고 허공의 물이 되고 다시 혜성이 되었다가 다시 태양이 되고 태양에서 지구가 떨어져 나오는 일을 아마 10억 번은 반복했을지 몰라.”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우주의 역사에 대해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주의 항성들과 행성들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원리 같은 거요. 물론 우리 우주는 138억년 쯤 된 걸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시에는 우주에 시작과 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던 시절이니까요. 10억년이면 상상 불가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위에 나온 우주의 온도가 영하 1백 50도라는 설정도 그래요. 지금은 우주의 평균온도가 영하 270도라고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정확하게 몰랐을 텐데, 아무튼 엄청나게 추울 거라는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 이야기들을 만들었겠죠.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출간년도가 1880년이라니 그 당시 과학적 지식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쪽에 관심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무리는 아닐 거라고 봐요.

그래서 의문이 듭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소설을 통해 러시아적인 전통과 그리스 정교적 전통을 지켜야 함을 강조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겉보기 교훈은 아니었을까? 무신론적이고 유럽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이반의 생각을 묘사하는 데에 작가가 들인 공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댓글 2개

  • 댓글

    정교 기독교적 사상에 대한 옹호는 겉보기 교훈이며
    이반을 통해 진짜 주제의식을 전달하려고 했다기 보다는
    본래 자기 사상과 신념의 반대되는 사상을 결코 약하고 무능하게 표현하지 않은 것이 중점인 것 같습니다.

    허수아비를 적으로 세우고 짓밟아 자신의 주제의식을 표현하기란 쉽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상정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존재를 적으로 세움으로서 그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지혜와 고민, 통찰이 필수적인 요소이며 오랜 고민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기 사상의 적을 가장 강한 존재로 세워놓았습니다.

    이반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전 생애에 걸친 신앙의 대한 회의와 고뇌 그리고
    작가 말년의 모든 지식과 이성적 사고들의 집합체를 체화한 인물입니다.

    이반은 이성과 지성의 화신으로서 알료샤와의 논쟁에서 논리적으로 그를 짓이겨버리죠.
    하지만 알료샤는 말과 논리가 아닌 삶으로 자신의 옳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정확히는 ‘실천적인 사랑’으로죠.

    이반은 모든 인류와 죄없는 아이들의 고통을 통해서 무신론을 역설하고
    그 중심에는 추상적 인류애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정작 실제 살아있는 사람들을 오만하게 내리깔아보고 경멸하며
    바로 옆에 있는 실제 사람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고 고백하죠.
    자신이 내세운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해서 무언가 헌신했다는 묘사조차 없습니다.

    알료샤는 바로 옆 실제 살아숨쉬는 사람들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줄 압니다.
    이반이 설파한 추상적 인류애에서 파생된 인류의 비극에 대한 비탄과 무신론은
    알료샤의 실천적인 사랑과 고통받는 아이 어린 일류샤의 죽음과 장례를 통해
    인류의 비극이 신의 희극으로 승화되어가는 과정속에서 결국 허울뿐임이 드러나죠.

    이성과 합리에서 귀결되는 무신론의 반론으로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실천적인 사랑을 내세웠습니다.

    이 것은 꼭 정교 기독교적 사상뿐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선은 그저 인류가 서로의 번영과 생존을 위해서 만들어낸 관념을 넘어서서
    인류와 우주의 시초부터 인류속에 내장된 아키타입의, 일종의 진실이지 않을까요?

    • deinekim

      황무지 같은 홈페이지에 방문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이렇게 정성스런 댓글까지 남겨주셔서 더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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