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감상문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를 읽고

어제 막 다 읽은 따끈 따끈한 글이 너무 좋아서 여기에 소개를 해 보고 싶습니다.
소개 하고 싶은 책은 우치다 타쓰루의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입니다.
이 책은 교수인 저자가 은퇴하기 직전 마지막 학기에 ‘창조적 글쓰기’라는 강의에서 했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불문학자답게 소쉬르나 롤랑 바르트, 부르디외 등 프랑스어권 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해석하고 있고, 또 하루키 문학의 세계문학성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내용은 번역본의 제목대로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에 대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는 마지막 장에 실린 한 단락이 이 책 내용을 대표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번 인용해 보도록 하지요.

“이 강의에서는 몇몇 주제를 임의대로 제시했는데, 그중 하나가 ‘언어가 전해지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수사적으로 아름답다든가 논리적이라든가 내용이 정치적으로 옳다는 차원과 관계없이 ‘전해지는 언어’와 ‘전해지지 않는 언어’가 있습니다. 아무리 비논리적이라도, 아무리 알아듣기 어려워도, 모르는 말이 많이 있어도, ‘전해지는 말’은 전해집니다. 어떤 언어든 뜻이 명료하고 문법적으로 정확하고 아름다운 운율을 실어 말한다고 해도, ‘전해지지 않는 말’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를까요?

차이는 바로 하나뿐입니다. ‘전해지는 언어’에는 ‘전하고 싶다’는 발언자의 절박함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에게, 가능하면 정확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싶다는 필사적인 마음이 언어를 움직입니다. 뜻하지도 않은 곳까지 언어가 닿도록 합니다.“

 

위의 내용과 연관해서, 제가 가장 감명 깊에 읽은 부분은 9강에 나오는 ‘메타 메시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메타 메시지는 메시지를 읽는 법을 지시하는 메시지를 뜻합니다. 이야기의 내용 보다는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전하는 방식이죠.
저자는 아가들의 예와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아가들은 어릴 때 엄마가 하는 말의 내용은 알아듣지 못해도, 엄마가 자기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알아들을 수가 있지요.
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예를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신의 언어는 비언어적 기호를 통해 전해집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도래했고, 아브라함은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이 언어의 수신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나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죠.
결국 메타 메시지는 수신자가 있는 메시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수신자가 그 메시지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온 것이라고 받아들일 때, 메시지는 강력한 영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발언자의 전하고 싶다는 절박함이 수신자에게 가 닿아 ‘나에게 보낸 메시지로구나’하고 받아들여질 때, 그 메시지는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저의 글쓰기는 배설의 기능이 강했습니다. 말하자면 대상을 상정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나 오다가다 보겠지 하는 정도. 아니면 우연히 지나가다 읽을 누군가를 막연하게 상정했거나.
그동안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들었으니, 이젠 좀 뱉어내야겠다. 혹은 마음의 응어리들을 글로 풀어야겠다는 수준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읽는다면 좋겠지만 안 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고, 그게 글쓰기의 부담을 갖지 않는 좋은 마음가짐이라고 여기기까지 했었죠.

이 책을 읽고 나니 글쓰기에 대해 고민이 많아지네요.
배설해서 우주에 흩어버리는 글쓰기가 아니라 수신자를 상정하는 글쓰기.
내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닿길 바란다는 것은 어떠한 목적이 있다는 뜻이고, 목적이 있다는 것은 내 글이 일으킬 결과 -소소한 결과라 할지라도- 에 대한 책임감의 문제를 야기하게 되겠죠.
그 동안은 가벼운 글쓰기였는데, 갑자기 무거워졌어요.
그렇지만 나는 초보니까 일단은 나와 내 주변을 제1수신자로 삼아보겠어요. 아직은 소심하니까요.
차근차근 수신자를 늘려보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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