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wing 그리기

보어 선생님의 황금빛 콧수염

올 여름 식구들과 코펜하겐에 여했을 갔을 때였다.
여행 둘째 날, 코펜하겐에 있는 성 두 곳과 박물관과 천문탑을 이미 방문하여 지칠대로 지친 우리는 천문탑 꼭대기 벤치에 앉아 다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하고 생각하며 피곤한 숨을 내쉬고 있을 때, 누군가가 말했다.
버스 타러 가는 길에 코펜하겐 대학에 들를까?
1400년대에 설립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학인데다가, 본관 앞에는 유명한 학자들의 흉상들이 주루룩 서 있다고 했다.
어, 그럼 거기 닐스 보어 동상도 있을까? 내가 물었다. 왜 닐스 보어냐고?
음. 그건 최근에 내가 과학자들을 존경하기로 맘을 먹었기 때문이다.
닐스 보어에 대해서는 양자 역학으로 유명하시다는 것 외에는 나도 아는 바가 없긴 하지만…
암튼 다시 길을 나섰다.
비가 오고 있었지만, 일기예보에서 비 예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걸었다.
대학 광장이 보이고 본관 건물이 보였다.
과연 소문대로 여러 분들의 흉상이 열 지어 서 있었다.
거기에서 가장 오른쪽에 계신 분 밑에 NIELS BOHR 라는 이름이 보였다.
나는 비를 맞으며 신이 나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보어 선생님 흉상은 다 청동 색깔인데, 콧수염만 황금색이었다.
원래 있던 콧수염인가? 아님 나뭇잎이 코 밑에 붙었나?
안경을 쓰지 않아서 모든 게 희미한 나는 나 나름대로 추리를 해 보았다.
일단 콧수염만 황금색인 게 이상하긴 하지만, 비에 젖어 떨어진 나뭇잎이 코 밑에 정확히 붙을 확률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나뭇잎을 코 밑에 붙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 높이에 붙이려면 사다리 정도 타고 올랐어야 했을 텐데, 누가 그런 정성까지 들일까?
여러 가지 생각을 짧은 시간에 해 본 결과, 나는 그것을 황금색 콧수염으로 여기기로 했다.
이 멀리까지, 이 아픈 다리 끌고 와서 찍은 보어 선생님 얼굴에, 심지어 바로 코 밑에 나뭇잎이 붙어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아서였다.
여우가 따 먹지 못하는 포도를 신포도라고 부른 심리와도 같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한 달도 더 지났는데, 갑자기 오늘 아침 이 기억이 떠올랐다.
콧수염의 진실은 뭘까?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구글 검색.
역시나 보어 선생님의 원래 흉상에는 수염이 없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코 밑에 나뭇잎을 붙어 놓은 것 같다는 생각에 기운다. (물론 젖은 나뭇잎이 떨어지다가 우연히 코 밑에 붙었을 확률이 0%는 아니겠지만.)
누가 이런 심한 장난을 쳤단 말인가!
뭐, 하지만 상관없다.
장난을 친 사람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는 그것을 계속 황금빛 콧수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으니까.

 

아래에는 코펜하겐에서 내가 찍은 사진을 올린다.

내 그림 실력이 완전 드러나긴 하지만, 뭐, 이제 겨우 그림그리기 이틀째인데 잘 그리면 그게 더 이상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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