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질 단상

* 사진은 지난 여름 완성한 코바늘 모티브 블랭킷.
* 지난 여름 이후 뜨개질에서 손을 놓고 있긴 하지만, 예전부터 좋아했던 일 중 하나이니 단상을 적는 것을 이해 바랍니다.^^

처음으로 뜨개질을 시작한 것은 언제였을까?
너무 옛 기억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던 것 같다.
미미 인형에게 옷을 입혀주고 싶어서 짜투리 실로 그야말로 완전히 네모지게 떠서 몸통에만 둘러 준 기억이 있다.

본격적으로 뜨개질을 시작한 계기는 중학교 가정가사의 뜨개질 시간이었다.
많은 친구들이 엄마에게 부탁을 해서 과제를 내었지만, 나는 뜨개질이 재미있어서 스스로 떴다.
특히 레이스 실로 도일리를 뜨는 게 너무 좋았다.
결국 학교에서 배웠던 동일한 모티브를 여러 개 떠서 이은 후 다이얼이 달린 커다란 전화기 받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뜨개질을 좋아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동일한 패턴을 반복적으로 뜨기 때문에 손을 바삐 움직이더라도 머릿속은 한 없이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뜨개질을 하고 있을 때면 어릴 때 읽었던 안데르센의 “백조왕자”를  떠올린다.
백조로 변한 오빠들을 구하기 위해서 말없이 심지어 마녀로 몰려 화형 집행장으로 가는 순간에도 한마디 변명도 없이 뜨개질만 하였던 엘리자 공주에 감정이입이 되어 쉬지 않고 손을 놀리곤 했다.

왜 하필 백조왕자였을까?
이전에도 수차례 적은 바 있듯이, 내가 공주이야기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겠지만, 엘리자 공주가 취미삼아 재미삼아 뜨개질을 한 것이 아니라, 오빠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필사적으로 뜨개질을 해야만 했던 장면이 내 기억에 너무 꽉 박혀서 그랬던 것 같다.

물론 내가 필사적으로 뜨개질을 하곤 했던 건 아니다.
나의 뜨개질은 그야말로 취미생활의 하나였고, 그저 시간을 재미있게 보내기 위한 일환이었다. 하지만 뜨개질을 하려고 도안을 하고 실을 고르고 할 때면 머리 속이 그야말로 그거 하나만 꽉 차서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런 상태의 나 자신을 보면서 엘리자 공주를 떠올리곤 했던 것 같다.

어쨌건 엘리자 공주는 쐐기풀로 11벌의 옷을 떠서 백조로 변한 오빠들을 구하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절대로 뜨개질은 하지 않았을 거 같다.
필사적으로 치열하게 뭔가를 다 하고 나면 아쉬움이 남지 않으니까.

나는 그렇게 치열하진 않았기 때문에 기회가 되면 또 뭔가를 뜨고 있을 것이다.
늘 아쉬움이 남으니까.
물론 예전 같이 부지런히는 못할 것이다. 자연의 원리에 따라 눈이 침침해질테니까.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와 21세기 호모데우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읽고

과학소설의 효시라 불리는 “프랑켄슈타인”.
올해 출간 200주년을 맞았다.
이 책은 고딕풍의 공포스럽고 기괴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인간과 유사한 괴물은 인간이 될 수 있는가, 과학자의 지적호기심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하는 등, 현재에도 여전히 그 의미가 살아있는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이 소설은 특이한 구조를 가진다. 화자가 3명인 이중 액자 구조로서, 다양한 관점으로 이야기를 전해준다. 화자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읽는 우리도 이 이야기를 다양하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

우선 이야기의 구조를 보면 A-B-C-B’-C’로 되어 있다.

A의 화자는 월턴 선장이다. 북극항로를 개척하려고 탐험을 떠난 그가 북극해에서 프랑켄슈타인을 구조한 이야기와, 프랑켄슈타인이 어떻게 최후를 맞이하였는지에 대해 적고 있는데, 이는 편지로 누이인 사빌 부인에게 전해진다.

B의 화자는 프랑켄슈타인이다. 그는 자신이 생명체를 만들어 낸 과정과 그 생명체가 자신 주변의 인물들을 살해한 것, 그래서 그 괴물을 찾아내어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를 자신을 구조한 월턴 선장에게 들려주고 있다.

C의 화자는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생명체이다. 그에게는 이름조차 없다. 그저 괴물이라고 불리는데, 그는 사회에 받아들여지고자 애쓰지만 결국 추한 외모로 인해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깨닫고 프랑켄슈타인에게 자신과 같은 여성 생명체를 만들어 내라고 강요한다.

우리 모두는 다 각자 자기 행위에 대한 변명을 갖는다. 아주 선하기만한 사람도 없고 아주 악하기만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괴물로 불리는 생명체가 자신을 창조한 자로부터 버림받고, 사회로 부터도 추방되어, 생명체에서 괴물로, 괴물에서 악마로 변해가는 과정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프랑켄슈타인조차도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만든 생명체에 대해 갖는 혐오감은 사실 그의 잘못만은 아니다. 그는 그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고, 그의 생명체는 창조자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존재여서 통제가 불가했다. 또한 그가 괴물의 배우자를 만들어 주지 못하는 이유도 그들의 존재가 인류에게 위험이 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포와 비극적 정서가 이 이야기 전반에 흐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아마도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만 상대를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비극의 시작은 바로 거기에 있다. 상대를 나의 입장으로만 바라보는 것.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이 서로 자신의 입장과 상대방의 입장을 나누고 합의하는 과정을 거쳤더라면 이러한 파국상황으로까지 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월턴 선장의 경우는 이와는 달리, 다시 남쪽으로 돌아가자는 선원들의 항의와 북극으로 가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 사이에서 타협을 하고 일단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나는 메리 셸리의 세련됨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야기가 갈등으로 치닫고 결국 파국에 이르고 말지만, 중심이야기의 바깥에서는 타인의 의견 경청과 자신의 욕구 보류라는 해결책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프랑켄슈타인은 2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다. 21세기 현재 더 중요하게 대두되는 문제인 듯하다. 21세기의 프랑켄슈타인은 아마도 호모 데우스, 즉 스스로 신이 되려는 인간일 것이며, 괴물의 존재는 인공지능이 될 것이다. 현재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처럼 인공지능을 발전시켜 현 인류를 뛰어넘는 존재를 만들고 싶은 지적, 기술적 욕구를 가지면서도 인공지능이 우리 인류를 멸망시키지는 않을까하는 공포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새로운 과학기술이 유토피아를 가져올지 디스토피아를 가져올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신기술개발은 너무나 거센 물결이라 아마도 그 방향을 돌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 이 소설이 어느 정도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가장 필요한 것은 각자의 입장과 욕구에 대한 공론화가 아닐까. 하나의 기업체나 기관이 신기술 개발을 하게 되면 그것을 공론화하고 시민사회와의 토론을 이어가야 한다. 합의되지 않은 기술은 일부의 낙관적 기대에도 불구하고 일부에게는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지나친 낙관론이나 공포에 치우지지 않고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정치적인 기술이다. 여기에서 정치적이라는 의미는, 우리는 하나의 사회, 국가, 인류라고 뭉뜽그려 이야기하지 않고, 사회, 국가, 인류가 서로 다른 개인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하나임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서로 다른 개인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의사소통과 합의의 과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 개인으로서는 과학기술에 대해 문외한이긴 하지만, 무작정 두려워하거나 혹은 기대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공부라도 하면서 걱정 또는 기대를 하련다.

감상문의 결론이 너무 교과서적이라 재미가 없긴 하지만, 어쩌랴, 의사소통과 합의가 현재까지 민주사회에서 가장 합리적 방법이라고 합의된 것이고, 또한 아는 게 힘인 것을.

암튼 200년 전 탄생한 괴물이야기에서 새로운 과학기술의 미래까지 생각하게 되다니, 이 책이 한번은 읽어봄직한 문제작임은 확실하다.

참을 수 없는 경어의 복잡함

초판 출간 2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켄슈타인을 다시 읽었다.
몇 년전에 1831년 판을 번역한 열린책들 버전을 읽었으므로, 이번에는 1818년 초판본을 옮겼다는 문예출판사 버전을 읽었다.

그런데, 이게 처음부터 완전히 다른 책을 읽는 느낌이었다.
열린책들은 월턴이 손위 누나인 사빌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하는데, 문예출판사는 그 사빌부인이 누나가 아니라 여동생이기 때문이었다.

누님에게는 엄청나게 공손한 존대말로 상황보고를 하는데, 누이 동생에게는 친절한 평상어를 쓰고 있었다.
영어의 sister 만으로는 누나인지 여동생인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역자가 임의로 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월턴이 프랑켄슈타인을 깨진 빙하에서 구조한 후, 둘이 대화를 할 때 보면 열린책들은
월턴은 경어를, 프랑켄슈타인은 하오체를 쓰고, 문예출판사는 하게체를 쓰고 있다. 하게체를 쓰기에는 월턴과 프랑켄슈타인의 나이차가 얼마 안나는 것 같아서 좀 뜨아~ 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번역에 따라 경어의 수준을 다르게 적용하였는데, 그 뉘앙스가 너무 다르다.
같은 이야기 다른 느낌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나이, 계층, 성별에 따라 써야하는 경어가 다 다르기 때문에 초면부터 호구조사에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이름을 막 부르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 호칭을 붙이려면 나이랑 하는 일 등등을 아는 것이 필수렸다.
언니인지 동생인지 아무개씨라고 부를지, 아무개님이라고 부를지….선생님이라고 부를지… 어떻게라도 상대를 부르려면 뭐라도 붙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기요~ ‘라는 이상한 말로 부르는 수 밖에.

거의 눈치 게임 수준이다.

일상에서도 이럴진데, 외국문학을 번역할 때 등장인물의 나이, 계층 등의 정보가 부족할 경우, 번역가가 경어를 쓸지 평어를 쓸지 꽤 고민을 해야만 할 거란 생각이 든다.

암튼 책의 내용이 중허지, 존대말인지 반말인지가 중헌건 아니니까.
느낌적 느낌들은 접어두고 내용에 집중하여 일단 책을 다 읽었다.

원래는 독서 감상문을 쓰려고 했으나, 현재 몸이 많이 피곤하여 생각을 깊게 하기도 어렵고, 처음 책을 열었을 때 존대말 반말의 뉘앙스 차이가 너무 크게 느껴져 일단 워밍업으로 경어의 복잡함에 대해 썼다.

프랑켄슈타인 독서감상문은 머리 맑을 때 재시도해 보련다.

개띠에 태어난 나의 운명에 감사를…

지난 주에 음력 설도 지냈으니 이젠 양력으로도 음력으로도 빼박 2018년이 되었다.
올해는 육십갑자로 무술년 개띠해이다. 황금개띠해라고 한다.
일단 금이 들어간걸로 보아 뭐가 좋아도 더 좋은 해려니 하고 있다.

이렇게 장황하게 서설을 푸는 이유가 있다.
바로 내가 개띠이기 때문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개띠해라고 딱히 좋은 일이 생길 일은 없다.
개띠해에 내가 개띠임을 생각하는 것은 그저 나를 한번 더 돌아보고픈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1970년생.
우리가 중학교를 입학하던 그해 전국적으로 중고등학교 교복두발자율화가 실시되었다.
입학식날 나는 엄마가 입학기념으로 특별히 사주신 골덴마이를 입고 학교를 갔다.
몹시 추웠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새옷입고 학교에 갔던 기억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우리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해, 다시 교복이 부활했다.
아마도 교육관련자 분들이 학생지도의 어려움을 호소하였고, 그것이 받아들여진 게 아닌가 싶다.

우리는 이미 고등학교 2학년이었기 때문에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그 때 이미 빨간색을 사랑하여, 빨간바지, 빨간치마를 자주 입고, 빨간 신발을 자주 신었는데, 만약 회색, 밤색, 검은색 일색인 교복만 입어야만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무조건 교복을 입어야만 했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거기에 또 잘 맞추어 살았겠지만, 지금처럼 칼라풀한 패션을 사랑하는 중년 아줌마가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2016년 신문에 실렸던 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 중 1970년생이 가장 진보적이라고 한다.(경향비즈, 2016.12.12)
왜 그럴까? 전문가들은 이 현상에 대해 여러가지 분석을 내 놓으셨겠지만, 내 추론은 이렇다.
(내 추론 따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마는…^^)

사람의 삶에 있어 의식주는 기본조건이다.
의복은 제2의 피부이자, 자기자신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한국의 세대 중에서 가장 예민한 청소년기 시절에 자율복장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학생으로서의 신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표출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집단주의를 기르는데 유니폼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 정신을 갖게 하는 효과가 크다.
반면 자율복장은 ‘나는 나’ 정신을 기른다. 아마도 요즘 말하는 개인주의자들이 많이 생겨나게 하는데 자유로운 복장이 큰 몫을 했으리라.

내가 20대 일때 사람들은 우리를 X세대라고 불렀다. 함수의 변수 X 처럼 확정되지 않은 혹은 알 수 없는 개인들이 모인 세대라는 뜻이지 않았을까?
뭐라 불리건 상관없다.
나는 내가 개인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는게 좋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는 게 좋다.

1970년에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과 1983년 당시 교복두발자율화를 결정해주신 교육당국에 감사드린다.
개띠인 나의 운명에도 감사한다.

 

추가. 교복이 더 편하다고 생각했을 분들도 있었을거라고 인정.
나의 개인적 소회, 그리고 70년생의 진보성에 대한 보고를 근거로 추론할 것일뿐임.

결론. 멍! 멍! 멍! 개소리로 여겨도 됨.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죽은 호랑이 전부가 가죽을 남기는 건 아닐테고, 죽은 사람들이 다 이름을 남기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느 면에서는 맞는 말인 것 같다.

내가 자주 다니는 주택가 길에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단 인식하게 되면 특별해 보이는 대리석 명패가 벽에 붙어있는 집이 있다.
당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현재는 체코 지역의 작가인 프란츠 카프카가 요양차 베를린에 와서 몇 달간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십수년 가까이 그 거리를 다니는 동안 나는 그 명패를 보지 못했다.
약 2년 쯤 전에 친구가 카프카가 살았던 집이 이 길 어딘가 있다며 알려주었다.
그제서야 그 집 벽에 작지 않은 크기로 붙어있는 그 명패를 보게 되었다.
주변의 집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그 집에는 아마도 보통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정작 카프카가 태어나고 살았던 도시 프라하에 갔을때는 카프카의 흔적을 주의깊게 보지 못했다. 카프카를 아직 모를때여서 혹은 함께 다니는 이들의 관심사가 달라서 그랬다. 카프카가 작업실로 쓴 집이 있다는 황금소로에 아주 잠깐 들른 기억은 나지만, 그 때에는 큰 감동은 없었다.

프라하에는 카프카 살았던 집이 있는게 당연하고, 본에는 베토벤, 잘츠부르크에는 모차르트, 바이마르에는 괴테의 집이 있는 게 너무 당연한 것 아닌가?
하지만 베를린에 아주 잠깐 머물었던 집에까지 그의 이름을 붙여 놓은 건 정말 의외였고, 또한 감동적이기도 했다.

이름을 남긴다는 게 이런걸까?
한때나마 머물렀던 곳이라면 그 어디에나 이름이 남는다는 것.
카프카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보면 그를 좋아하게 될 수 밖에 없는데, 좋아하는 이의 흔적을 찾게 되면 기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때마다 그길을 들러본다.

하지만 젊어 병들어 죽은 당사자에게는 이름이 남는다는 게 아무 의미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름은 죽은 이의 명예라기 보다는 남은 이들에게 주는 선물일 것이다.
내가 죽어 내 이름을 타인들에게 선물로 남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남긴 이름은 감사한 맘으로 받는다.
프란츠 카프카

프란츠도 그렇고 카프카도 그렇고
참 멋진 이름이다.